한국의 세익스피어 신재효를 만나다/고창 신재효고택

2013. 12. 11. 07:05전라북도 견문록/고창 견문록

 

고창읍성 바로 입구에 고창군 중요민속자료 제39호로 지정된 초가집 한 채가 있다. 그 집이 판소리 여섯 마당 중 「춘향가」·「심청가」·「박타령」·「토별가」·「적벽가」·「변강쇠가」 등의 판소리 이론을 정립한 동리 신재효의 집이다.

판소리 이론을 정립했다고 하니 신재효도 판소리를 한 사람인 줄 알았더니 그는 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소리에 매료돼 자신의 부를 바탕으로 소리하는 사람을 모셔 후진을 양성하고 판소리 이론을 체계화하여 지금으로 보면 학교 교장이자 연구소 소장과 후원자역할을 동시에 했다고 하겠다.

 

 

신재효(申在孝)1812(순조 12)∼1884(고종 21)는 조선 후기의 판소리 이론가·개작자·후원자로 1812년 고창에서 태어나 1884년 73세 때 타계했으며,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백원(百源), 호는 동리(桐里)로 부친 신광흡(申光洽)은 경기도 고양 사람으로 한성부에서 지방관청의 서울 일을 대신 해주던 경주인 노릇을 하다가 같은 성씨로 연고가 있는 신광택, 신성, 신백록, 신약문 등이 고창 현감으로 내려 간 것을 계기로 고창에 내려와 관약방(官藥房)을 하여 재산을 모았다고 한다. 신재효는 아버지가 마련한 기반을 바탕으로 35세 이후에 이방이 되었다가 나중에 호장(戶長)에 올랐으며, 1876년(고종 13)에 기전삼남(畿甸三南)의 한재민(旱災民)을 구제한 공으로 정3품 통정대부가 되고, 이어 절충장군을 거쳐 가선대부에 승품(陞品)되고, 호조참판으로 동지중추부사를 겸하였다.


 

 

한국의 세익스피어 신재효

그가 고창 이방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40세 전후에 이미 천석꾼이었고 그의 집 크기만도 2천 평이 넘었다니 그가 고창에서 얼마나 부호 측에 끼였는지 알 수 있다.

타고난 성품이 풍류를 즐겨 판소리를 즐겨들었으며 자신의 넉넉한 재력을 이용하여 판소리 광대를 모아 생활을 돌보아 주면서 명창들을 초대해 판소리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동편제(東便制)와, 서편제(西便制)의 장점을 조화시켜, 판소리의 ‘듣는 측면’에다 ‘보는 측면’을 강조하였고, 「춘향가」를 남창과 동창으로 구분하여 어린 광대가 수련할 수 있는 대본을 만들었다.

그는 민속음악을 연구하고 체계화하는 데 일생을 바쳤으며, 집안에 ‘노래청’을 만든 다음 수많은 명창들과 교류하였고 김세종, 정춘풍, 진채선, 허금 같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판소리 사설 외에도 30여 편의 단가를 지었으며,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재산을 모으는 방법을 다룬 「치산가(治産歌)」, 서양의 침입이라는 시대적 시련을 걱정하는 「십보가(十步歌)」·「괘씸한 서양(西洋)되놈」, 경복궁 낙성 공연을 위해 마련한 「방아타령」, 그 밖에 「오섬가(烏蟾歌)」·「도리화가(桃梨花歌)」·「허두가」 등을 지었다.

 

 

도리화가 와 춘풍간별곡

 

일설에 의하면 59세였던 신재효과 24세였던 제자 진채선은 사제 간을 넘어 연인관계였다고 한다. 그것은 고종 4년 경복궁이 준공되자 경회루에서 8도 명창초청 축하잔치가 있었는데, 신재효는 제자 진채선을 남장으로 변장시켜 출전시키게 된다. 대원군 앞에서 진채선은 방아타령을 불러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고 결국, 그녀는 대원군의 눈에 들어 대원군의 기생대령이 되고 만다.

 

 

그러자 홀로 고창에 돌아온 신재효는 곧 돌아올 줄 알았던 진채선이 끝내 돌아오지 않자 외로움을 느끼게 되고 외로움은 곧 그리움으로 변하여 그 정을 ‘도리화가’라는 노래로 엮어 진채선에게 보낸다.

 

 

스물 네 번 바람 불어/

만화방창 봄이 되니/

구경가세 구경가세/

도리화가 구경가세/

 

바람이 스물 네 번 불었다는 가사에는 신재효의 진채선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녹아 있었고, 이에 진채선은 답가로 ‘춘풍간별곡’을 지어 ‘대원군을 모시는 몸으로서 그리운 마음을 어떻게 할 수 없음’을 표현하였다고 한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싹튼 애틋한 연모는 결국 이루어지지 못하고, 신재효가 늙어 몸을 가누지 못할 때 고창에 내려온 진채선은 늙은 스승의 옆에서 병간호를 하다 스승이 사망하자 홀연히 고창을 떠났다는 전설이 있다.

 

그러한 신재효는 진채선의 추천으로 대원군에게 오위장이라는 벼슬을 받았고 1876년(고종 13)에 기전삼남(畿甸三南)의 한재민(旱災民)을 구제한 공으로 정3품 통정대부가 되고, 이어 절충장군을 거쳐 가선대부에 승품(陞品)되고, 호조참판으로 동지중추부사를 겸하였으니 진채선이 신재효의 신분 급상승에 얼마나 도움을 주었는지 알 수 있다.

 

 

신재효는 중인이었던 아전출신으로서 조선말기 실학사상이라는 시대적 흐름에 따라 큰 돈을 번 뒤 신분상승욕구를 판소리를 통해 배출했다. 판소리를 듣는데 만족하지 않고 예술로 승화시킨 정책가였으며, 노래를 짓는 작곡가였다.

또한, 판소리 미학을 정립해 판소리가 발전할 수 있도록 한 연구가였으며, 판소리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의 후원자였다.

신재효로 인해 고창은 판소리의 중심도시가 되었으며 판소리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그들 속에서 새로운 명창들이 탄생될 정도로 고창은 소리의 고장이었다.

신재효와 판소리에 대한 더 많은 것을 알고자 판소리박물관을 가 보고 싶었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공사중이어서 들어가보지 못했다.

이제 고창시내를 나와 운곡습지가 있는 독곡마을에 가서 점심을 먹고 선운산으로 향한다.


(상기 글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많은 분들의 글을 취합 정리한 것입니다.)

 

1편 : 감성으로 떠난 고창 1박2일 여행.

2편 : 단풍대신 첫눈을 만난 청량산 문수사

3편 : 대숲에 구렁이 소나무가 있어요/ 고창읍성

4편 : 한국의 세익스피어 신재효를 만나다/신재효고택, 

5편 : 눈보라 몰아친 고창 선운산 늦단풍

6편 : '운곡습지' 지킴이 마을 독곡마을/마을공동체 사업

7편 : 남도의 비무장지대 고창운곡습지 

 

(글 : 포토뉴스코리아, 광주문화재단 문화관광탐험대 simp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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