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 3대무신 정지장군의 경렬사

2014. 3. 14. 07:05한국의 산 견문록/무등산

 

최근 (사)정지장군 연구유적보존회(회장 정득채)는 최영, 이성계와 더불어 고려말 최고의 무장이었던 정지장군의 곡성 옥과 미라사 대첩지에

대한 역사적 조명을 새로이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미 이 유적보존회는 1644년 세워져 동구 동명동에 있던 정지장군의 사당이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1871년 철거된 뒤 유허비만 남아

있던 것을 1981년 무등산 자락 정지장군의 묘소앞에 경렬사를 복원해 정지장군을 배향하고 있죠.

경렬사에는 그의 9대손 충무공 정충신(鄭忠信)도 함께 배향하였으며 이어 설강 유사, 송설정 고중영, 구성 전상의, 송암 유평, 고중영의 아들 구암 고경조, 시은 유성익 등을 추가하여 8현을 모셨다고 유허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지(鄭地, 1347~1391)는 하동(河東)이 본관이며, 시호는 경렬(景烈)입니다.

1374년(공민왕 23) 중랑장을 거쳐 전라도 안무사가 되어 왜구 토벌과 수군 창설에 이바지하여 한국최초의 수군제독이라는 칭호도 받고 있답니다. 이후 전라도 순문사, 해도원수(海道元帥)를 역임하였고 양광·전라·경상·강릉도 도지휘처치사(都指揮處置使)를 지냈으며, 그 뒤 김저(金佇)의 옥사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당시 공으로 2등 공신이 되었습니다.

말년에 개성부판사(開城府判事)로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나가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경렬사는 광주시 북구 망월동에 있습니다.

3월부터 11월까지 무등산 둘레를 한바퀴 도는 무등산 순환버스가 지나가는 길목에 있지여.

동광주나들목에서 담양방향 도동고개를 지나 석곡동 주민센터 못가서 오른쪽 무등산방향으로 들어가면 나옵니다.

 

 

군왕봉 자락 아래 양지바른 곳에 있는 경렬사는 사당 입구에 홍살문이 세워져 있고 경내에는 사우, 내삼문, 외삼문과 유물관, 관리실, 경렬사 유허비, 유적정화 기념비 등이 세워져 있습니다. 사당 뒤쪽 언덕 위에는 정지의 묘가 있는데, 전형적인 고려시대 방식의 예장석묘(禮葬石墓)로서 광주시기념물 제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정지장군의 재실인가봅니다.

 

 

하동정씨 재실이군요.

 

 

이곳에는 정지장군의 묘소외에도 하동정씨의 묘들이 많습니다.

 

 

홍살문을 지납니다.

 

 

무등산 자락에는 수많은 충신들과 광주를 빛낸 위인들의 사당과 묘가 있는데요, 대표적인 것이 바로 김덕령장군의 충장사, 전상의 장군의 충민사,

해광 송제민의 운암서원 등이 있습니다. 경렬사는 충장사, 충민사, 운암서원 등이 바로 도로가에 있어 찾기가 쉬운것에 비하면 무등산 본자락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 있어 찾아가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하지만, 정지장군의 묘소에서 바라보는 무등산의 모습을 보면 이 자리가 무등산 최고의 명당자리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답니다. 그럼 정지장군의 어떤 분이었는지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경렬사 복원에 관한 자세한 기록도 있군요.

정지장군을 배향한 사당은 이곳말고 나주에도 있습니다.

나주경렬사라고 하지요.

 

 

하동정씨 묘소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정지 장군의 옥과현 미라사대첩이 지금 역사적 조명을 받고 있는데요.

미라사대첩은 고려말 여수, 순천지역을 침범한 왜구들에게 대항키 위해 왕에게 수군창설 병선제조 왜구토벌 평구책을 상소, 임금으로부터 전라도 안무사(按撫使) 천호공명첩(千戶空名牒)을 제수받아 연해에 방위군을 창설하고 이어 예의판서 순천병마사(禮儀判書 順天兵馬使)를 제수받고 호남지역 방어책임자로 임명된 정지 장군이 순천병마사 재직 시 순천에 침범한 왜구들과 접전해 낙안지역에서 대승을 거두었죠.

 

이어 영광 백수면 구수포로 침입한 왜구가 광주로 이동하는 것을 추격해 화순 동복에서 격전을 벌였고, 야음을 틈타 도주한 왜구들이 옥과현 장파봉 아래 미라사(현, 곡성군 옥과면 마전리)에 총집결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답니다.

 

정지 장군은 급히 군사를 이끌고 추격해 미라사에 집결한 왜구들을 포위하여 400~500명으로 추산된 왜구들은 완전 섬멸하여 한자리에서 재로 산화시켜 버렸답니다.

이때가 서기 1378년 무오년으로 장군의 나이 32세였으며, 옥과 주민들은 전승을 축하하는 잔치를 3일간이나 벌일정도로 기뻐했답니다.

이것이 바로 정지장군의 옥과현 미라사대첩이죠.

이것을 빛내기위해 곡성군에서는 유적보존회와 같이 미라사대첩비를 비롯한 미라사대첩공원을 근처에 세우려고 한답니다.

 

 

 

정지 장군은 미라사 대첩 후 그해 담양에 침투한 왜구를 격파해 17명의 목을 베는 전승을 올렸고 10월, 11월 전투에서 왜구를 무찌른 공로로

순문사에 올랐고 진포해전과 관음포해전, 남원전투에서 승리해 해도원수 문하평리로 제수됐답니다.

이에 정지장군은 왕으로부터 11회의 포상을 받고 판개성부사(判開城府使)에 임명 됐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결국 45세 젊은 나이에 숨졌습니다.

 

 

 

경렬사 안내문입니다.

 

 

관리사무소는 홍살문옆에 있으며, 지금 보는 곳은 재실입니다.

 

 

정지장군 사적비.

 

 

외삼문인 충의문을 지나 사당으로 들어갑니다.

 

 

유물전시관도 있습니다.

이곳엔 유명한 정지장군의 환삼[ 鄭地將軍環衫 ]과 정지석탑[ 鄭地石塔 ]의 모형이 있습니다.

 

 

정화기념비와 경렬사 유허비가 있네요.

 

 

경렬사 유허비

 

정화기념비는 훼손되어있습니다.

복구중에 있겠죠?

 

 

내삼문인 경앙문입니다.

서원에 들어갈때는 항상 오른쪽 문으로 들어갔다가 왼쪽문으로 나와야 합니다.

사찰의 대웅전이나 향교, 사당, 사우, 서원 등을 출입할 때는 우입좌출(右入左出), 동입서출(東入西出)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성현들의 위패가 배향된 향교나 서원에 갔을 때 신도(神道)인 중앙통로를 왕래해서는 안되며 공수(供手)라 하여 왼손을 오른손위에 놓고

두 손을 마주 잡아 공경의 뜻과 예를 다해야 합니다.

전각의 층계를 오를때는 합보(合步)라 하여 뛰어 다니지말고 오를때마다 발을 가지런히 모아 올라가야 합니다.

 

 

정지장군을 모신 사당입니다.

 

 

정지장군입니다.

 

 

 

 

정지장군을 보고 유물전시관으로 가봅니다.

 

 

아마도 그 유명한 관음포대첩인가봅니다.

관음포대첩은 1383년 (우왕 9년) 왜구가 120척이라는 엄청난 함대를 이끌고 합포(마산)으로 들어온다는 합포원수 류만수의 첩보를 받은

정지장군은 나주와 목포의 전선 47척을 이끌고 밤낮으로 노를 저어 합포로 달려갔습니다.

정지장군이 섬진강 어구에서 전열을 정비하고 있는데 왜구가 마산을 거쳐 남해 관음포만까지 들어와 버립니다.

왜구는 정예군 140여 명을 태운 큰 배 20척을 선봉으로 세우고 공격해 왔지만 정지장군의 화포공격에 17척이 격파되는 등 무참히 패하고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이 전투가 바로 최영의 홍산대첩, 이성계의 황산대첩, 최무선 나제의 진포대첩과 함께 고려말 왜구를 격퇴한 4대첩으로

불리는 관음포대첩입니다. 이 전투에서 최무선이 만든 화포가 위력을 발휘했죠.

 

 

태조강헌대왕실록

 

 

보물 336호인 정지장군환삼[ 鄭地將軍環衫 ]입니다.

실물은 광주시립민속박물관에 전시돼 있습니다.

 

 

정지장군환삼[ 鄭地將軍環衫 ] 

 

보물 제336호이며,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철편(鐵片)과 철제고리를 이용하여 만든 삼의(衫衣)입니다.

전체 길이 72cm, 길이 7.5∼8cm, 가로 5∼8.5cm의 철편 주위에 구멍을 뚫고 철편과 철편을 고리로 연결하여 만들었죠.

갑옷의 일종으로 사용하던 것으로 그 유래를 볼 수 없는 귀중한 것입니다.

 

고리의 지름은 1cm 정도의 것으로, 뾰족한 양끝을 겹친 것과 양끝을 작은 못으로 고정한 두 가지가 있으며, 안팎으로 2중이 되도록

철편과 철편을 연결하였고, 6편(片)을 연결하여 한 줄로 하고, 전면에 여섯 줄이 있어 두 줄은 여미게 되어 있습니다.

배면은 7편을 한 줄로 하여 다섯 줄로 등을 가리게 하였으며, 두 어깨는 고리만을 연결하여 어깨를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게 되어 있답니다.

 

또한, 정지석탑[ 鄭地石塔 ]의 모형이 전시돼 있는데, 정지석탑은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4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향토인들이 손수 돌을 깎고 다듬었으며, 크기는 높이 2.25m, 너비 45cm이고, 탑신(塔身) 받침은 자연석의 큰 바위이며 4각형의 탑신 4개와

조그만 원형 탑신, 옥개석(屋蓋石) 5개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사당을 나와 정지장군의 묘소로 가봅니다.

하동정씨 묘소들이 있는 맨 위쪽 묘가 정지장군의 묘입니다.

 

 

 

맨위쪽 묘입니다.

 

 

일반적인 묘와 많이 틀리죠?

바로 돌무덤형식입니다.

 

 

정지장군예장석묘[ 鄭地將軍禮葬石墓 ] 입니다.

 

정지장군예장석묘는 1975년 12월 30일 광주광역시기념물 제2호로 지정되었으며, 석조로 된 둘레 19.3m, 높이 1m의 묘입니다.

묘비와 석인(石人) 2기가 있으며, 왜적을 무찌르는 데 큰 공로를 세운 정지를 예장한 뒤 묻은 묘로 예장이란 국가에서 예를 갖추어

장사를 지내는 것으로 국장의 다음가는 국가장입니다.

충민사의 전상의 장군의 묘도 이러한 예장석묘이죠.

 

 

정자장군의 묘소에서 무등산을 바라봅니다.

지난해가 정지장군의 622주기였네요.

매년 11월 19일 경렬사에서는 민,관,군 합동으로 제향행사가 있답니다.

해군에는 정자장군의 이름을 딴 잠수함 정지함이 있는데 군악대와 같이 참석했다고 합니다.

해군의 아버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정지장군은 우리나라 최초의 수군을 탄생시킨 주역으로

지금도 정지제독이라고 해군에서는 부른답니다.^^

 

 

멋있죠?

 

 

정지장군은 나주출신이지만, 묘는 망월동 경렬사 위에 있답니다.

광주 충장로의 지명이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시호를 땄듯이 금남로의 지명은 바로 정지장군의 9대손인 금남공 정충신 장군의 시호를 땄죠.

이렇게 정지장군의 후손들은 정지장군 이후 조선전기의 무신이자 그의 아들인 정경[ 鄭耕 ] 1370 ~ 1421으로 이어져 대를 이어 나라에

충성을 다했으며, 9대손인 정충신 장군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임진왜란 때 권율 휘하에서 종군했고 만포첨사로 국경을 수비했죠.

이괄의 난 때 황주, 서울 안현에서 싸워 이겼고 정묘호란 때 부원수가 되고 조정에서 후금과 단교하려는 데 반대해 유배되었답니다.

 

후에 장연(長淵)에 이배(移配)된 뒤 풀려났으며, 이듬해 포도대장(捕盜大將)·경상도병마절도사를 지냈죠.

1636년 3월 그가 우려한 것과 같이 조선의 조정에서는 청나라를 배척하는 주전론(主戰論)이 득세하여 청과 단교하는 사신을 보냈고

후일 병자호란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결국 병세가 나빠지자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1636년 5월 사망하였습니다.

하동정씨는 광주에서도 꽤 유명한 가문이죠. 광주를 기고박(기씨, 고씨, 박씨)의 고장이라고 하지만, 하동정씨도 만만치 않죠.

무등산에 오시걸랑 충장사, 충민사만 들르지 말고 경렬사도 꼭 방문해 보시길 권합니다.

 

 

 

(글, 사진 : 포토뉴스코리아, 광주문화재단 문화관광탐험대 simp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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