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여행)이순신 장군과 진도관문 벽파진

2014. 3. 20. 07:05전라남도 견문록/진도 견문록

 

진도여행을 친구들과 같이 떠났습니다.

원래 계획은 완도 청산도였으나 이왕 가는거 유채꽃 흐드러지게 핀 청산도를 보고 싶어 5월 초로 연기한 뒤 진도를 찾게 된 것입니다.

진도는 우리나라에서 3번째로 큰 섬이죠. 제일 인구가 많았던 시기엔 무려 10만 명이 넘었다고 하니 언제나 옛 영화를 찾을 수 있을까요?

진도는 예로부터 유배지로 유명했죠. 그 영향으로 시(詩),서(書),화(畵),창(唱)의 본고장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또한, 진도는 삼보삼락(三寶三樂)으로 유명합니다. 진도개, 구기자, 돌미역 등 세가지 보물과 진도민요, 서화, 홍주 등 세가지 즐거움이

바로 삼보삼락입니다.

 

 

동창회 산악회의 3월 정기산행은 산행대신 이렇게 여행입니다.

분기마다 1회씩 산 대신 여행지를 찾기로 했는데 그 첫번째 여행지가 바로 진도입니다.

광주광역시청에서 3월 9일 아침 7시 정각에 출발합니다.

 

 

모두 25명의 친구가 참여했네요.

우리 동창회 산악회는 회장이 여성이고 총무는 남성입니다.

격식의 파괴가 진행됐죠. 꼭 남자가 회장, 여자가 총무인 시대는 지났습니다.

뒤에 서 있는 친구가 Hoony로 동창회 산악회 총무입니다.

딱 1년만 하고 그만둔다고 하는데, 역대 최고의 총무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임원진의 임기가 1년이지만, 연임할 수 있으니 앞으로 1년은 더 하리라 믿어봅니다..ㅎㅎ

 

진도여행은 진도대교를 넘으면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동안 진도를 오가면서 보지 못했던 전망대가 망금산 정상에 우뚝 서 있습니다.

저기를 가봐야 하는데 대형버스가 올라가지를 못합니다. 진도타워까지 도로를 확장중에 있어 대형버스가 접근하기가 쉽지 않네요.

걸어서 가면 10분 정도면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진도타워 구경까지 약 1시간 정도 소요될 것으로 보여 진도타워는 패스했습니다.

높이가 약 60미터 정도되고 지하 1층에 지상 7층으로 2013년 11월에 준공되었답니다.

이곳에서 바라보면 진도대교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고 울둘목의 거센 풍랑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땅끝 전망대나 완도타워처럼 육지나 섬의 맨 끝에 있지 않고 이렇게 진도로 들어오는 입구에 있어 의외였지만,

진도의 상징과도 같은 진도대교와 명량해전의 울둘목을 조망하는 이유만으로 이곳에 들어설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이순신 장군의 칼과 판옥선을 모티브로 만든 진도타워.

 

 

진도대교입니다.

진도타워에서 내려다 보면 더 멋질 것 같습니다.

혹시 진도로 여행오시면 꼭 진도타워를 가 보세요.

해남 우수영 관광단지까지 관광객들이 왔다가 이 진도타워를 보고 불현듯 올라보고 싶어 진도대교를 넘어온다고 합니다.

즉, 100억 원이 넘는 돈을 투입해 진도타워를 만들었지만, 해남 우수영에서 그칠 관광객이 진도대교를 넘어오니 먼 미래를 생각한다면

당장 눈앞의 투자대비 성과보다 훨씬 더 큰 이득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진도대교는 쌍둥이 사장교입니다.

오른쪽 것이 1984년 완공된 진도대교이며 왼쪽 것은 2005년에 완공된 제2진도대교입니다.

길이 484m에 폭 11.7m로 물살이 세기로 유명한 울둘목에 다리를 만들기위해 양쪽 해안가에 강철교탑을 세운 뒤

케이블로 다리를 묶어 지탱하는 사장교입니다.

그런데 궁금해집니다. 현대 건설과학으로도 물살을 이기지 못해 사장교를 만드는데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은 어떻게

이쪽에 쇠사슬을 양쪽으로 묶었을까요?

 

 

진도대교 아래에서 본 울둘목 승전광장입니다.

정유재란 당시 13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을 격파한 세계 최고의 해전이 있던 현장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동상 크기가 어마어마합니다. 기왕이면 일본쪽을 바라보던가 울둘목을 바라보고 있었다면

더 의미가 깊었겠어요..

울둘목이란 '소리를 내어 우는 바다 길목'이라는 뜻의 순 우리말이고 한자로는 명량(鳴梁)해협이라고 합니다.

울둘목의 폭은 294m정도로 물살이 세고 소용돌이가 쳐서 그 소리가 해협을 뒤흔들 정도라고 합니다.

 

 

진도여행의 시작은 이렇게 진도대교와 진도타워, 울둘목 승전광장을 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오늘 진도여행은 전라남도문화해설사 도팍 이평기 님이 수고해 주셨습니다.

진도에서 최고로 해설 잘하고 미남인 분이니 단체로 진도여행을 계획하고 계시는 분들은 꼭 이평기님의 해설을 들어보시도록 추천합니다.

 

 

진도여행 두번째 코스는 바로 이충무공 벽파진 전첩비입니다.

13척의 배로 133척의 대함을 깨뜨린 세계 해전 사상 불가사의한 승리를 거둔 것과 진도출신 참전 순국자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1956년 11월 19일 진도군민들의 성금을 모아 세웠습니다.

비신의 높이는 3.8m, 폭 1.2m, 두께 0.58m로 명량대첩에 대한 역사를 적은 비문은 시인 노산 이은상이 짓고 글씨는 진도출신 서예가

소전 손재형이 썼습니다.

 

 

벽파진은 고려 때에는 대진(大津)이라고 불렀습니다.

진도(珍島)의 동부 해안가에 위치하여 진도대교가 생기기 전에는 진도로 들어가기 위한 관문이었으며, 국방상으로도 일본과 중국을 경계하는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지금은 번창했던 옛 모습은 찾을 길 없이 쓸쓸한 나루터 언덕엔 벽파진 전첩비만 벽파 바다를 향해 외롭게 서 있습니다.

벽파(碧波)란 푸른 물결이라는 뜻으로 벽파리 마을 이름은 해변에 핀 벽도(碧桃)나무의 꽃이 물결 짓는 아름다운 풍경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에는 이순신(李舜臣)의 수군영(水軍營)이 배치되었으며, 순천에서 시작된 봉수(烽燧)가 지나는 길목이기도 합니다.

벽파진은 수진장(守津將) 한 사람이 배치되어 관할하였으며, 해남현(海南縣)의 삼기원(三歧院)으로 통하는 대로의 길목에 위치하였던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또한, 벽파나루는 삼별초가 여몽연합군과 협상을 벌이던 곳으로, 여몽연합군은 벽파나루에 상륙하여 용장산성을 함락하고 삼별초의 진도를 정벌합니다. 정유재란 때에는 이순신 장군이 해남의 어란포 해전에서 승리한 후 이곳 벽파진 해전에서 두 번째 승리를 거둔곳이기도 합니다.

이순신 장군은 이곳 벽파진을 전라우수영으로 옮기고 왜군을 명량해협으로 유인하여 해남을 거쳐 한양으로 북상하려는 왜군의 전략을 단숨에

깨뜨리고 정유재란을 끝장내 버립니다.

 

 

벽파진 전첩비 뒤로는 팔손이 나무가 자라고 있습니다.

통영 비진도의 팔손이 나무 자생지는 천연기념물 63호로 지정되었죠.

그곳에선 총각나무라고 한답니다.

 

여덟 갈래로 갈라진 잎사귀의 모양을 두고 팔손이라고 했는데,

벌 나비도 없는 하얀 눈이 내리는 초겨울에 눈을 닮은 꽃을 피운답니다.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보니 전첩비의 구조가 놀랍기만 합니다.

바로 이 거대한 자연암의 상부를 떨어내어 높이 1.2m, 폭 4.7m, 길이 5.7m 규모의 거대한 거북좌대(귀부)를 만들었으며,

그 위에 비석을 세우고 높이 1.2m, 폭 1.2m, 길이 2.1m의 크기의 머릿돌을 올려 놓았습니다.

좌대에서 머릿돌까지의 높이가 6.2m로 동양 최대 높이라고 합니다.

 

 

거북이의 좌대와 자연암이 붙어있습니다.

암반을 깎아 비석의 좌대를 만든 것입니다.

또한, 거북은 물이 있어야 살죠. 그래서 비가 오면 물안에서 놀게하기위해 좌대주변을 더 깊게 팠습니다.

비가 오지 않고 가뭄이 들면 뒤쪽에 수도가 있어 물을 이곳에 공급해 준다고 하네요.

그렇다면 사시사철 거북은 물 마르지 않는 곳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비를 세운 진도군민들의 정성을 알 수 있게 하는 광경이었습니다.

 

 

비문의 글자는 단 한글자도 같은 글자가 없다고 합니다

한글과 한문, 그리고 상형문자가 혼재된 아주 특이한 비석입니다.

비문을 옮겨보겠습니다.

 

碧波津 푸른 바다여 너는 榮光스런 歷史를 가졌도다.

民族의 聖雄 忠武公이 가장 외롭고 어려운 고비에 고작 빛나고 우뚝한 功을 세우신 곳이 여기더니라.

獄에서 풀려나와 三道水軍統制使의 무거운 짐을 다시 지고서 病든 몸을 이끌고 남은 배 12隻을 겨우 거두어 일찍 郡守로 임명되었던

珍島 땅 碧波津에 이르니 때는 公이 53세 되던 정유년 8월 29일.

이때 朝廷에서는 公에게 陸戰을 명령했으나 공은 이에 대답하되 臣에게 상기도 12隻의 戰船이 남아 있삽고 또 臣이 죽지 않았으매

敵이 우리를 업수이 여기지 못하리이다 하고 그대로 여기 이 바다 목을 지키셨나니 예서 머무신 16일 동안 사흘은 비 내리고 나흘은 바람 불고

맏아들 薈와 함께 배 위에 앉아 눈물도 지으셨고, 9월 初7일엔 賊船 13隻이 들어옴을 물리쳤으며 初9일에도 賊船 2척이 甘浦島까지 들어와

우리를 엿살피다 쫓겨갔는데 公은 다시 생각한 바 있어 15일에 우수영으로 陳을 옮기자 바로 그 다음날 큰싸움이 터져 12隻 적은 배로써

3百 30隻의 적선을 모조리 무찌르니 어허 痛快할사 萬古에 길이 빛날 鳴梁大捷이여. 

 

그날 진도 백성들은 모두들 달려나와 군사들에게 옷과 양식을 나누었으며 이천구, 김수생, 김성진, 하수평, 박헌, 박희령, 박후령과 그의 아들

인복 또 양응지와 그 조카 계원 그리고 조탁, 조응량과 그의 아들 명신 등 많은 의사들은 목숨까지 바치어 千秋에 護國神이 되었나니

이는 眞實로 珍島民의 자랑이로다.

이 고장 民俗 강강술래 구슬픈 춤과 노래는 擬兵戰術을 일러주는 양 가슴마다 눈물어리고 녹진․명량 두 언덕 鐵鎖 걸었던 깊은 자욱엔

옛 어른들의 전설이 고였거니와 이제 다시 이곳 同胞들이 공의 恩功과 正氣를 永世에 드높이고자 碧波津頭에 한 덩이 돌을 세움에 미쳐

나는 삼가 끓어 엎드려 대강 그때 事績을 적고 이 노래를 붙이노니 열두 隻 남은 배를 거두어 거느리고 碧波津을 찾아들어 바닷목을 지키실 제

그 心情 아는 이 없어 눈물 혼자 지우시다.

3百 隻 敵의 배들 山같이 깔렸더니 울두목 센 물결에 거품같이 다 꺼지고 북소리 울리는 속에 저 님 우뚝 서 계시다.

거룩한 님의 은공 어디다 비기오리. 피흘린 義士魂魄 어느 적에 사라지리. 이 바다 지나는 이들 이마 숙이옵소서. 

 

檀紀 4288년 9월 16일 鷺山 李殷相 글을 짓고 素筌 孫在馨은 글씨를 쓰고 珍島 敎育區 敎育監 郭忠魯는 區內 敎職員 生徒들을 비롯한

모든 君民과 道內敎育 同志들의 誠力을 모아 이 비를 세우다.

 

 

거북의 코를 두 손가락으로 막고 머리를 감싸 안으면 이 거북의 기를 받아 대운이 온다고 합니다.

 

 

임진왜란이후 잠시 소강상태였던 전쟁은 정유년(1597년)에 전열을 가다듬은 왜군이 조선을 재침범하였습니다.

군수물자의 보급지인 호남을 정벌하지 못한 것이 임진년의 패인이라고 지적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1597년 12만 대군을 이끌고

부산에 남아있던 2만의 왜군과 합류하여 정유재란을 일으켰고, 호남을 최우선적으로 정벌하고자 '우군'은 양산을 출발해 밀양, 창녕, 합천을

거쳐 황석산성으로 보냈고, '좌군'은 부산을 떠나 배편으로 사천과 왜교에 상륙하여 하동, 구례를 지나 남원성으로 가게 하였습니다.

 

황석산성은 쉽게 점령되었으나 남원성은 전라병사 이복남과 명나라 부총명 양원이 이끄는 4천의 병사와 6천의 주민들이 결사항전하였으나,  

수 만 정의 조총을 가진 왜군의 상대가 되지 못하고 8월16일 결국 함락되었으며, 성 안의 조선인은 모두 살육당하였습니다. 

이렇게 남원성과 진주성 공략으로 전라도를 손에 넣은 소서행장은 원균이 이끄는 조선수군을 궤멸시킨 거제 앞바다 칠천도 해전으로 전라도 땅  

마지막 남은 해남을 수중에 넣고 전쟁에 마침표를 찍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칠천도 해전으로 조선수군을 궤멸시킨 왜군이 300여 척의 전함을 이끌고 해남으로 밀려들어올 때 명랑해협에서 단 13척에 불과한  

이순신 장군의 수군에 대패하며 제해권을 상실하고 결국 정유재란은 끝을 맺게 되는데, 만약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협이 없었더라면, 호남을  

수중에 넣은 왜군은 물자를 자유롭게 보급받으며 북상하여 한양을 수중에 넣고, 결국은 산동반도로 상륙하여 국세가 미약할데로 미약해진  

명나라까지 점령하여 지금의 세계역사는 일본 중심으로 바뀌었을 것이라는 것이 지배적입니다.

칠천도 해전에서 달랑 12척의 배를 가지고 도망쳐 살아남은 배설에게서 이순신은 강진 회령포에서 배를 인수하여 해남 북평의 이진포에서  

며칠 지내며 형세를 살핍니다.

 

남원과 진주를 함락한 왜 육군이 육로로 계속 한양으로 진격하고, 왜 수군은 남해를 거쳐 서해안을 따라 한양에서 육군과 합세하여  

수중에 넣고 명나라까지 진출하다는 장기계획을 간파한 이순신은 왜 수군이 해남 우수영과 진도 사이의 해협인 울돌목을 반드시 지나갈 것으로  

판단하고 진도 벽파에 진을 친것이죠. 

그 후 구루시마 미치후사를 대장으로 한 왜 수군이 어란진으로 들어왔고, 그곳에서 진을 치다 1597년 9월 16일 133척의 배를 몰고 명량으로  

들어가 이른바 13대 133이라는 세계해전상 유래가 없는 기적과도 같은 대승을 기록하고 정유재란을 끝내버린 이순신의 명랑대첩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순신장군은 임진왜란 7년의 전쟁 중 마지막 노량해전까지 23번의 해전에서 단 한번도 진 적이 없습니다.

즉, 23전 23전승을 기록한 것이지요.  이렇게 중요한 명량해전의 승리는 바로 어란진 해전과 벽파진 해전으로 이어진 두번의 해전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어 사기가 오른 덕택인데요, 벽파진해전(碧波津海戰; 1597년 음력 9월 7일, 양력 10월 16일)은 서쪽으로 이동하던 왜선 55척 중 호위

적선 13척이 나타나자, 한밤중에 이순신이 선두에서 지휘하여 벽파진(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에서 적선을 격퇴시킨 해전입니다.

 

이 전투로 왜군은 조선 수군이 확실히 13척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이 전투 역시 이순신이 왜군을 명량해협 쪽으로 유인하기 위한

고도의 계획이었습니다.

진도대교가 생기기 전 진도의 관문이었던 벽파진. 멀리 해남 어란진도 보이는 곳입니다.

진도에 오시걸랑 꼭 이곳을 와 보세요. 이순신 장군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글, 사진 : 포토뉴스코리아, 광주문화재단 문화관광탐험대 simp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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