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여행)740년 전 삼별초의 함성이 들리는 용장산성과 용장사

2014. 3. 26. 07:05전라남도 견문록/진도 견문록

 

삼별초(三別抄)는 바로 진도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좌별초(左別抄)·우별초(右別抄)·신의군(神義軍)으로 구성된 고려 군사제도로 삼별초는 본래 고려시대 최씨 무신정권의 사병조직으로 1219년(고종 6년) 최우(崔瑀)가 설치한 '야별초(夜別抄)'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야간 경비를 목적으로 조직된 야별초는 도성을 순찰하고 도적을 잡는 등 민간의 치안까지 담당하면서 '좌별초(左別抄)'와 '우별초(右別抄)'로 확대 재편되었죠. 그러다가 1231년(고종 18년)부터 몽골의 잦은 침략으로 인해 포로로 끌려갔던 고려군 중에서 탈출한 병사들이 몽골에 대항하는 '신의군(神義軍)'으로 결성했는데, 이로써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이 완성되었고 이것을 통합해 '삼별초(三別抄)'라고 총칭하게되었습니다.

 

 

1232년(고종 19년) 고려는 몽골군을 피해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하였고, 삼별초는 약 30년간 몽골에 맞서 특수정예군대로 대몽항쟁(對蒙抗爭)을 벌였는데, 1258년(고종 45년) 최씨 무신정권이 몰락하자 몽골에서 돌아온 고려의 태자가 1259년 원종(元宗)으로 즉위한 뒤 몽골의 압력 으로 1270년(원종 11년) 5월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삼별초의 해산을 명령했습니다.

삼별초는 대몽항쟁기에 고려의 최정예군으로 활약하면서 원에 대해 적개심이 가장 강력했던 집단이었습니다.

 

 

원종의 사실상 항복과 뒤이은 삼별초에 대한 혁파령은 곧 삼별초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으로 개경 환도가 결정되자 삼별초는 ‘배중손’을 대장군으로 추대, 왕족 ‘승화후(承化侯) 온(溫)’을 새로운 왕으로 삼고 고려의 환도를 거부해 개경정부에 반기를 들게 됩니다.

처음 강화도에서 저항을 시작한 삼별초는 이탈자가 속출하자 6월 3일 1,000여 척의 대선단에 재화와 백성, 군사들을 모두 싣고 강화도를 떠나 서해안 요지를 공략하며 남행하여 1270년 8월 진도의 용장성에 웅거하고 항쟁을 벌입니다. 

 

1270년 진도에 도착한 삼별초는 곧바로 새 수도를 건설하였습니다. 삼별초가 건설한 궁궐과 성곽은 현재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활발한 발굴작업으로 그 전모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유적지 조사보고에 의하면, 도성이었던 용장산성의 총 길이는 약 13㎞이며 성 안의 면적은 258만 평 정도로

추산된다고 하니 얼마나 규모가 컸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용장산성(龍藏山城)은 기존 용장사(龍藏寺)를 중심으로 조성하였는데, 삼별초의 새 정부에서는 스스로에게 고려의 정통성이 있음을 자부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당시 고려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인 풍수도참설을 내세워 삼별초 정권의 정당성을 강조하였다고 하네요.

 

 

 

그러나 1271년(원종 12년) 5월 여ㆍ몽 연합군에 의해 진도가 함락되면서 결국 온왕이 죽고 배중손은 전사했지요.

삼별초는 장군 김통정(金通精)의 지휘 아래 탐라(제주도)로 후퇴해 투쟁을 계속했으나, 1273년(원종 14년) 6월 벽파진에 상륙한 여.몽 연합군 세력에 패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삼별초가 진도를 항전의 기지로 선택한 것은 대체로 몽고병이 꺼리는 해전을 할 수 있는 섬이면서도 진도가 남쪽 해안의 여러 섬들 중에서 크고 물산이 풍부하여 군량의 자급자족이 가능했다는 점, 명량해협을 끼고 있어 전략상 요충이자 여러 조건이 응전에 유리하였다는 점, 삼별초나 무신정권의 기반이 있었던 곳이라는 점 등이 손꼽혀지는데, 이는 진도 역사의 지리적 특성과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최씨 정권의 경제적 기반이 진도에 있었음을 일러주는 기록은 조선 영조 때의 진도 사람 김몽규(金夢奎)가 지은 『옥주지(沃州誌)』(1761)에 보이는 최충헌의 손자이자 최우의 아들이었던 최항이 지금 보고 있는 진도 용장사에 머물면서 전횡을 하였다는 기록이 바로 그것이라고 합니다.

 

 

 

 

용장사는 고려실록의 사고가 옮겨질 계획이 있었던 곳이며, 대규모 불경 간행도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이런 기록으로 봐서 용장사가 있는 진도는 무신정권과 오랜 인연이 있었으며, 몽골세력에 맞서 전투태세를 갖추면서 세력을 확장하여 전라·경상의 해안과 남해·창선·거제 등의 30여 개 섬을 장악하고, 독자적으로 일본에 사절단을 파견하기도 하는 등 명실상부한 해상왕국을 건설하여 몽고에 대항하였다고 합니다.

 

 

용장사 약사전에 봉안된 석불좌상은 삼존석불로 약함을 둔 본존과 좌우협시로 구성됐으며, 광배(光背) 일부가 떨어져 나가고 동체(胴體)도 원형이 아닌 시멘트로 발라버려 원래의 모습을 찾을 길 없다고 합니다. 그나마 대좌석(臺座石)이 원형대로 남아 있어서 고려 전반기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용장사가 처음 세워진 때는 고려전기 고왕(高王) 때라고 합니다.

고왕은 고려 태조 때의 후진국(後晋國) 고왕[936~943]이라고 하기에, 고려 전기에 창건된 절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답니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 용장사를 추측해본다고 합니다.

“최우(崔瑀)의 서자인 만종(萬宗)과 만전(萬全)이 무뢰배를 승려로 만들어 고리대금업을 시작하고 백성을 착취하였다. (중략) 만전이 일찍이 진도의 한 절[珍島一寺]에서 통지(通知)란 부하와 함께 심한 횡포를 부렸는데 안찰사 김지대(金之垈)가 그 절에 이르자 만전이 여러 가지 청탁을 했다.” 

 

 

1985년에 나온 「진도용장성지표조사보고서(珍島龍藏城地表調査報告書)」에 따르면 용장성지는 258만 평에 달하는 광범위한 지역으로 조사되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조사된 건물지 유구 가운데 초석의 형식 등으로 보아 삼별초군이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의 법당은 최근에 지은 것으로 이곳에 고려시대것으로 추정되는 삼존석불이 있습니다.

 

 

삼별초군이 자신들의 수도를 삼고 해상왕국을 꿈꿨던 용장산성과 용장사.

진도전투에서 장군 배중손이 전사하고 왕으로 옹립된 승화후 온(承化候溫)이 생포되어 참수되었으며 삼별초 진도정권은 1년 만에 붕괴되었지만,

삼별초의 잔여세력은 제주도로 거점을 옮겨 원종 14년(1273)까지 2년간 항전을 지속하였습니다.

 

북제주군 애월읍의 항파두성은 당시 제주 삼별초의 거점으로, 이들은 애월항의 입구에 목성(木城)을 쌓고 해변에는 장성(長城)을 돌로 쌓아 여몽연합군의 침입에 대비하였다고 합니다.

김통정(金通精)이 배중손을 대신해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으며, 처음 1년 동안 자체적인 조직 정비 및 방어시설의 구축에 주력하였고 이후 약 반년 간은 삼별초의 원래 본거지였던 전라도 연해안에 대한 군사활동을 전개해 점차 그 활동을 충청 경기 연해안까지 확대해 또다시 개경을 위협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여몽연합군이 다시 삼별초 공략에 나서 원종 14년(1273) 4월 제주 삼별초는 결국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맙니다.

삼별초의 항전을 끝으로 고려의 대몽항전은 종지부를 찍었으며 이후 고려는 14세기 중반까지 원의 속국이 되고 말았답니다.

 

결국 원나라가 쇠퇴할 무렵 왕위에 오른 공민왕때 이르러 원나라의 속국에서 해방되는데, 공민왕은 즉위 2달만에 개혁을 시작해 무신정권기에 설치된 ‘정방’을 폐지하였고, 바로 다음날 개혁조서를 선포하여 토지와 노비에 관한 제반 문제를 해결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또한 1356년(공민왕 5년)에는 당시 원나라 기황후(奇皇后)를 등에 업고 권세를 부리던 기철(奇轍)세력을 역모죄로 숙청하고, 원의 연호와 관제를 폐지, 고려 문종 당시의 칭제(稱制)로 환원하였으며, 그동안 내정을 간섭해 온 ‘정동행중서성이문소(征東行中書省理問所)’도 폐지하였습니다.

또한 100년간 존속한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의 협력을 얻어 공격해 혁파하고 몽골에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였으며,

같은 해 압록강 너머 원나라의 영토를 침공하기도 했습니다.

삼별초가 해내지 못한 숙원을 공민왕이 80여 년만에 해 낸것이죠.

삼별초에 대한 마지막 이야기는 맨 마지막 편인 남도진성편에서 다시 이야기 하기로 하겠습니다.

용장산성과 용장사를 나오면서 740여 년전 삼별초군의 커다란 함성이 들려오는 듯 했습니다.

 

 

 

(글, 사진 : 포토뉴스코리아, 광주문화재단 문화관광탐험대 simp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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