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의 시작과 끝이 되어버린 안압지

2014. 11. 6. 06:30대한민국 견문록/경상도 견문록

 

동창회 산악회의 1박2일 특별산행으로 대구 팔공산에 오른 후 포항 호미곶에서 숙박하고 다음날 관광차 들른 곳이 경주였다.

몸도 마음도 무거운 50대 들어 맨날 얕고 평탄한 전라도 지역 산만 오르다 일년에 딱 한 번 있는 전라도 밖의 바깥나드리로

대구 팔공산에 올랐으니 많이들 피곤하고 고단했나보다.

호미곶에서 경주까지 오는데 거의 모두 자울자울...꿈나라로 가버렸다.

 

경주에서 오후 3시 경 광주로 출발해야 하기에 사전답사에서 꼭 가봐야 할 곳으로 정한 곳이 바로 불국사, 안압지, 첨성대, 천마총 등

네 곳으로 불국사 관람에 이어 점심식사 후 야경이 멋지다는 안압지를 둘러보게 되었다.

안압지는 낮에 보는 것 보다 밤에 보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은 이제 경주여행을 오고자 하는 사람들은 모두 아는 것 같다.

사전답사 때는 저녁식사를 한 후 안압지를 둘러보았는데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그야말로 북적북적^^

하지만 낮에 본 안압지는 한산해서 또 다른 멋이 배어 있었다.

 

 

 

안압지의 다른 이름은 동궁과 월지이다.

처음에는 월지(月池=달빛이 고운 연못)라고 부르다가 후일에 안압지(기러기와 오리만 노는 연못)로 불렀다.

안압지란 기러기雁,오리鴨,연못池를 써서 신라가 망한 뒤 오랜세월 방치해 두는 바람에 갈대가 무성하고 자라고

달빛이 아름답던 연못에 기러기와 오리떼만 몰려와 살다보니 조선시대부터 안압지라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삼국사기에 신라 문무왕 14년(674)에 창건하였다고 기록 되었으며 679년에는 궁궐을 매우 장엄하게 중수하였으며

그후 예장왕 5년에 임금과 신하들이 연회장으로 사용한 뒤로 많은 임금들이 연회장으로 사용하였으며 신라말기 경순왕이 후백제

견훤의 난을 겪은 뒤 931년 고려태조 왕건을 초청하여 주연을 베풀어 주며 신라의 위기를 호소하고 고려에 합병해 주기를 청 한

장소로 알려져 있다.

 

 

우리 일행이 우르르 들어가니 안압지가 꽉 차버렸다.

 

 

 

안압지 옛 건물 터.

이 들을 모두 복원하면 얼마나 장엄할까?

 

 

안압지는 궁궐인 반월성에서 동북쪽으로 십분 거리에 있어 왕자가 머물던 동궁으로 알려졌으며,

임해전이 동궁으로 알려졌으나 어느 건물터가 동궁이었는지는 모른다고 한다.

 

 

 

 

안압지를 하늘에서 보면 건물이 있는 쪽은 건물의 배치에 따라 직선적인 굴곡이 있고,

다른 곳은 40여 차례로 굽이치는 곡선형 굴곡을 준 것이 특색이다.

 

 

1975년부터 2년간에 걸쳐 발굴을 했는데, 건물 26개소, 입수(入水)와 출수(出水)시설물, 그리고 담장 등이 확인되었으며,

유물 3만여 점이 출토되었다.

그 중 5개소의 건물터가 못과 닿아있게 지었으며 역사에 나오는 임해전과 동궁터는 이들 5개 건물을 연결한 회랑 8개소 지역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연못 안에는 석축을 쌓은 섬이 있으며 흙을 높이 쌓은 가산(假山)이 있어 중국 한(漢)나라 때의 도가사상(道家思想)을 바탕으로 지어

졌으며, 이와 같은 건축양식은 백제의 궁남지(宮南池)와 망해정(望海亭), 신라의 안압지(雁鴨池)와 임해전(臨海殿)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안압지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전시된 곳.

녹유도깨비기와는 잡귀를 몰아낸다는 벽사의 뜻을 가진 특수한 용도를 가진 기와 중의 하나로,

두 눈을 부릅뜨고 입을 크게 벌린 무서운 표정은 악귀의 침입을 막아주는 상징물로 건물에 장식되었다.

 

 

 

치미(鴟尾) : 고대의 목조건축에서 용마루의 양 끝에 높게 부착하던 장식기와.

치미는 길상(吉祥)과 벽사(辟邪)의 상징으로서 의장(意匠)된 상상의 새인 봉황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목간 :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에 죽간(竹簡)과 함께 문자 기록을 위해 사용하던 목편(木片).

 

금동용머리는 의자의 손잡이 용도라고 한다.

 

 

보물 1475호인 금동보살판불

 

 

 

 

 

 

영화를 잃어버린 동궁의 옛 모습은 이러했을 것이다.

이 모습 대로 복원된다면 금새라도 신라시대로 돌아갈 것 같다.

 

 

안압지는 1980년 정화공사로 3동의 누각을 복원하였고 나머지 건물터는 주춧돌을 배열하여 옛 모습을 추측하게 하였다.

 

 

신라가 당을 몰아내고 삼국통일을 달성한 676년 보다 2년 전인 674년 축조된 안압지.

삼국통일로 한반도의 주인됨을 미리 알았을까?

그 후로 나라가 없어질 때까지 신라의 임금들은 이 화려한 임해전에 거처하며 신라의 태평성대를 춤과 노래로 즐겼을 것이다.

그 자리에는 신하도 있었을 것이고 외국 사신도 있었을 것이다.

 

 

 

안압지는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급습해 경애왕을 포석정에서 자결케 한 후 신라 임금의 자리에서 며칠을 지냈던 곳으로

견훤의 군사들은 신라의 보물들을 맘대로 약탈하며 승리를 만끽했다.

 

 

그 후 고려태조 왕건이 신라를 구원하려 했으나 견훤은 김부를 신라왕으로 세워놓고 후백제로 돌아가 버렸다.

 

 

도망가는 견훤을 쫓다 경주로 돌아온 고려태조 왕건을 경순왕은 이곳에서 지극 정성으로 며칠 간 모셨을 것이다.

 

 

후에 쪼그라들데로 쪼그라든 신라가 결국 고려와 합하자는 최후의 회의도 이곳에서 열렸을 것이다.

 

 

935년(경순왕 9) 10월 신라는 후백제 견훤과 고려 태조 왕건의 신흥세력에 대항할 길이 없자 군신(君臣)회의를 열고

고려에 항복할 것을 논의하였다.

태자는 천년사직을 하루 아침에 버릴 수 없다고 반대하였으나, 결국 고려에 귀부(歸附)를 청하는 국서(國書)가 전달되었다.

태자는 통곡하며 금강산에 들어가 베옷을 입고 초근목피로 여생을 보냈는데, 그가 바로 경순왕의 장남 마의태자이다.

 

 

 

경순왕이 안압지를 마지막으로 떠나면서 신라는 고려에 935년 통합되었으며, 이듬해 고려는 후삼국을 통일했다.

 

 

안압지의 입수구.

 

 

안압지 출수구는 보지 못했지만, 이곳으로 들어온 물이 연못 안 곳곳을 돌아다니다 출수구로 흘러나갔다고 한다.

출수구에는 나무로 된 마개가 있어 수위를 조절했다고 한다.

 

신라 천년의 시작과 끝이었던 안압지.

언제나 그 영화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안압지는 밤에 보는 것이 훨씬 아름답다고 합니다.

낮에 본 안압지와 밤에 본 안압지는 어떻게 틀릴까요?

그 야경은 내일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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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포토뉴스코리아, simp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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