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여행)천년고찰 화순 모후산 유마사(維摩寺)

2012. 2. 21. 23:00전라남도 견문록/화순 견문록

 

 

창건된지 1400년정도 되는 화순 모후산 유마사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은 한국전쟁때 빨치산 전남도당 근거지였다는 이유로 사찰이 국군에 의해 모두 소실되어 맥이 끊겼다가

10여년전부터 유마산 중창대작불사가 이루어져 현재까지 이어오기 때문이다.

 

청정 화순의 어머니같은 산인 모후산기슭아래 천년세월 모진풍파 이겨내며 버티다가

결국 한 줌 재로 변해 버렸던 유마사에 지금 부처님의 이름으로 대웅전을 비롯한 범종불사가 진행되고 있다.

유마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승보종찰 송광사의 말사로 창건에 대한 기록은 [동복읍지][유마사 향각변건 상량문]등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백제 무왕 28년(627년)중국 당나라의 고관이었던 유마운(維摩雲)과 그의 딸 보안(普安)이 창건하였고,
그가 수행하기 위해 지은 암자가 지금의 귀정암의 옛터로서 뒤쪽에 아직도 유마운 탑의 유적이 남아있으며,
유마운의 딸 보안보살 역시 불법을 깊이 깨달았는데 동복 이서면의 보산뒤에 보안사를 지었으나 지금은 없어졌으며

유적만 남아 있다고 한다.

 

현재 유마사 경내에는 보안보살이 체로 달을 건져 올려 비구승을 공부시켰다는 제월천과 보안보살이 치마폭에 싸 옮겨 놓았다는

보안교(普安橋)가 14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일주문 옆에 현존하고 있다.

그 뒤 유마운을 이어 여러 선사가 귀정암, 사자암, 금릉암, 은적암, 운성암, 동암, 오미암, 남굴암 등의 8암을 지어서 승려들의 수도장으로

이용하였다 하나 불행하게도 모든 암자들이 소실되어 그 흔적만 남아 있다고 한다.

 

17세기 무렵 경헌(1542-1632)스님이 절을 중건했고 그로부터 50년 뒤에 가안선사가 나한상을 만들었는데 가안선사가 만든 나한상은

특히 뛰어나 세상에 보기 드문 작품이었다고 전한다.


이어서 1889년(고종26년) 전라도 관찰사인 김규홍(1845)이 절을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어 조선시대까지도 향화가 계속 이어진 것을

뒷받침하고 있다.(유마사 홈페이지참고)

 

일주문은 단청이 입혀지지 않은채 단청불사를 기다리고 있고.

측면이 기둥을 겸한 벽체로 이루어 졌으며  槿園 具哲祐가 쓴 '維摩寺' 현판이 걸려 있었으나 떼어 놓았다.

대웅전불사로 대웅전이 아직 지어지지 않아 현판을 걸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까지 부속건물로는 극락전, 명부전, 염왕전, 응진당, 향당, 봉향각 등이 있어 상당한 규모의 가람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6.25동란때 모후산의 산세가 험하고 지리적인 요충지에 접해있다 보니 빨치산 전남도당이 유마사에 은거하면서 사령부가 있었던

백아산과 모후산을 연계하여 활동하였고 지금도 집게봉 9부능선에는 당시 빨치산들이 쓰던 참호가 있다고 한다.

빨치산 전남도당이 은거하였다는 이유로 고려때까지만 해도 호남지방 최대의 사찰이었던 유마사는 국군에 의해 사찰건물이 모두 소각되어

한 줌 재로 변해버린 쓰라린 아픔을 겪게되고 지금은 10여년전 부터 대대적인 불사를 일으켜 옛모습에 가깝게 복원중이라고 한다.

 

 

 

송광사의 수장고에서 확인된 청동 시루(銅甑)는 시루의 외면에 [……乾隆六年……維摩寺 東庵……]이라는 명문이 시문되어

1746년 維摩寺의 東庵에서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어 당시 유마사가 대가람이었던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송광사의 말사지만 그 유물이 확인되었으면 유마사로 되돌려 주어야 되지 않을까 싶다.

 

 

단청이 입히지 않은 봉황루. 역시 대웅전 불사로 인해 현판이 걸려있지 않다.

 

 

그 계단을 올라서면...템플스테이를 알리는 팻말이 걸려있고.

 

 

계단위 정면으로 보여야할 대웅전은 터만 있다.

 

유마사에 전해오는 전설에는 [627년(백제 무왕 28) 수나라 요동태수 유마운(維摩雲)과 그의 딸 보안(普安)이 창건한 절로

유마운은 612년(백제 무왕13) 수양제의 정권대사로 백제무왕을 만나 고구려를 칠 협상을 하려온 사신이었다.

백제무왕은 수양제의 뜻을 받아드려 고구려를 칠 때 협력하기로 약조하였다. 그러나 막상 수나라 양제가 고구려를 치려고 살수에 대군을

이끌고 왔을 태 무왕은 군사를 파견하지 않았다. 배반한 것이다.

그래서 을지문덕에게 수나라가 살수 대첩에서 패하자 수양제는 백제무왕을 원망하였다.

 

살수대첩을 마지막으로 수나라는 망하고 당나라가 건국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유마운은 아내마저 죽었다.

잘못된 외교로 수나라를 망하게 한 죄인으로 새로선 당나라엔 갈수가 없었다.

그는 어린 딸 보안을 데리고 백제 수도 익산으로 왔으나 반겨줄 사람이 없어서 걷고걸어서 순천 모후산까지 왔다.

그리고 산기슭에 싸리 집을 짓고 산나물을 뜯어 먹으며 연명하였다. 그러나 영특한 어린 딸이 자라 아버지를 위로하고 부양하였다.

 

나라 잃은 서러움에 울부짖던 유마운은 마침내 부처님에 의지하게 되었다.

그 모습을 안타깝게 생각한 백제무왕은 유마운과 딸 보안을 위하여 집을 지어주고 그 옆자리에 절을 지어주었다.

그의 이름을 따서 유마사 라고 하였다] 출처: 김용필 소설 [유마사가는길]

 

 

 대웅전 불사 모연문과 조감도가 붙어 있어 그곳에 대웅전을 새로 짓는 불사가 진행중임을 알려주고...

 

 

                                                    

                             대웅전 불사 동참금

                            삼존불

3억원

   기둥

3천만원

   대들보

2천만원

   도리

2백만원

                            불단

5천만원

   추녀

5백만원

   양보

8백만원

   서까래

5십만원

                            닷집

6천만원

   주춧돌

2백만원

   용머리

1천만원

   부연

2십만원

                            

                             이렇게 대웅전 불사에 동참하면 된다.

 

비구니승들을 위한 승가대학교와 대학원으로 쓰이는 건물.

 

 

산신각(山神閣)

토속적 민간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는 건물로 보통 사찰에서는 대웅전 뒤쪽에 위치하고 있다.

산신각은 맞배지붕을 한 정면 1칸, 측면 1칸의 낮고 단촐한 건물로 돌담으로 둘러 있고 사찰내 제일 높은 곳에 있다.

 

 

능선길을 몽땅 깎여버린 모후산의 슬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웅전 풍경은 바람에 살랑거리고만 있다.

 

 

모후산 유마사의 기와불사에 동참하면 지금 바로 대웅전의 지붕으로 올릴 수 있다. 

 

 

유마사 중창대작불사 조감도..

 

 

당간지주가 있는 계단위 법당은 대웅전을 새로이 지으면 관음전으로 쓰인다고 한다.

대웅전 불사로 아직 현판을 달지 않았지만 법당내에 부처님을 모셔놓고 있다.

 

 

법당내엔 아미타불 주불이 모셔있고...좌우 협시불로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

 

 

 

천년고찰 모후산 유마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승보 종찰 송광사의 말사로서,
627년 백제무왕 28년에 창건되었으며, 6.25 동란무렵 국군에 의해 소실된 지 약 50여년 만에 비로소 참신한 인재양성과
수행도량을 목표로 중창대작불사를 시작하였고, 호남지역 유일의 비구니 전통강원(승가대학,승가대학원)을 건립하게 되었다.

우리 문화를 지키면서 바른 삶을 지향하는 참신한 수행자를 길러냄으로써, 삶을 정화하고 고통에 처해있는 많은 사람들을

올바른 삶으로 이끌 수 있는 승려를 배출하는 것을 유마사 승가대학의 설립취지로 삼고, 분발대지(分發大智), 함양덕성(涵養德性), 전법도성(傳法道生)을 교훈으로 하고 , 계.정.혜(戒定慧) 삼학을 기본교육방향으로 삼으며, 경.율.론 삼장의 기본학습이 곧바로 수행으로

연결되어 교육과 수행을 일치시키는 기본 교과과정 이외에도, 컴퓨터, 외국어, 포교, 복지 등의 교양과목도 활성화하여 현대에 맞는

전통강원의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 나간다하며, 송광자 율원과 강원 및 지역대학과 연계하여 사니미율의 ,불교사, 유식, 중관, 천태지관 등

학식의 폭을 넓혀 보다 진취적인 분위기에서 공부하는 교육환경 조성에 힘쓰고 있다 한다.

 

 

종루에 들어설 목어, 범종, 운판, 법고는 범종불사를 기다리고 있다.

 

 

                               모후산 유마사 범종불사 모연문이 걸려있고.

 

 

요사채.

 

 

유마사 제월천의 청아한 물빛에 모후산을 채로 떠 올려 보려 하지만 계속 쏟아내는 아픔이 상념으로 남아있다.

물을 마시며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처연한 슬픔을 간직한 모후산의 모습은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제월천에 얽힌 전설만 들려올 뿐이다.

 

維摩寺가 創建되자 수많은 佛弟子들이 운집하여 大寺刹로서 그 명성이 드높아갔다.

佛弟子를 자원하여 온 젊은이들 중에 한 젊은이는 普安의 그 아리따운 자태에 넋을 잃고 짝사랑에 고민하고 있었다.

어느날 달빛이 휘황한 밤 普安이 샘터에서 갈증을 풀기 위해 샘물을 뜨려고 할 무렵 갑자기 젊은 승이 普安을 껴안고

욕을 보일려고 했다.

普安은 침착한 어조로 [샘물에 떠 있는 달을 채로 건져 올릴 수 있으면 그대의 소원대로 내 몸을 맡기겠오.]

이 말을 들은 젊은 중은 옆에 있는 채로 달을 건져 올리려고 여러번을 되풀이 하나 실패를 거듭했다.

[그러면 내가 한 번 해 보겠오.]

普安이 젊은 중에게서 채를 받아 샘물에 채를 넣고 단번에 그 채속에 달을 떠 올리지 않는가.

젊은 중은 달을 떠올린 普安의 신통에 놀래기 보다는 불타는 정욕이 앞서 그 자리에서 다시 普安을 붙잡고 실랑이를 하며

늘어지자,

[大雄殿에 가서 내 몸을 허락하겠으니 따라 오시오.]

하며 총총 걸음으로 대웅전에 들어가니 젊은 중도 따라 들어가자마자 보안을 겁탈하려고 덤벼들자 대성일갈이 떨어진다.

[저 부처님이 보이지 않느냐! 저 부처님만 부처님인 줄 아느냐!]

말이 떨어지자마자 普安의 모습은 불상이 된 채 움직이지 않는다.

이 광경을 보자 젊은 중은 불도의 오묘한 지리를 깨닫게 되어 후일 고승이 되었다고 하며

이 샘을 濟月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傳하여 지고 있다.(자료출처:순천대학교 박물관)

 

 

언젠가는 신도들이 일으킨 범종불사로 모후산의 새벽을 깨우는 범종이 울려 퍼질 것이고..

 

 

봉황루를 나와 유마사를 나오니..

 

  석탑일까? 석등일까.  그리고 부도가 석교를 중심으로 좌우로 도열해 있고.

 

 

 

쌀 한 가마는 들어갈 듯한 돌 절구통이 누워있어 그 옛날 사찰의 규모를 알 수 있을 듯 하고.

 

 

                      縣監鄭元弼永世不忘碑(현감 정원필 영세불망비)1861년 9월에 관찰사 金奎弘이 세운 것이다.

                     光緖 5年(1879)京師 金景潭과 觀察使 金奎弘이 香堂을 세운 기록이 있어 당시 관찰사였던 김규홍은

                 여러모로 유마사에 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마사가 불타 없어지기전 부터 있던 유물은 보물1116호로 지정된 고려시대 혜련스님의 유골을 모신 부도탑인

                  혜련부도와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일주문 옆 유마사 보안교가 전부지만, 그 잿더미위에 지금 유마사의

                  중흥을 위한 불사가 2001년부터 시작되어 10년간 127억 8천만원을 들여 법당 단청 및 보안실 증축, 산신각보수,

                  제월천 보수, 요사채및 해우소 건설, 선열당 건설, 종무소및종고루 건설, 사천왕문 및 만세로 건설 등 대불사 진행중이고

                  이제 마지막으로 대웅전과 범종불사만 남았다고 한다.

 

 

                         일주문 옆 계곡을 가로 지른 보안교(普安橋)는 화순군 향토문화유산 제30호로 지정되어 있다.

                             유마운의 딸 보안이  절을 지을 목재를 운반하는데 계곡물이 많아서 골치였는데 어느 날 큰 바위가 굴러와서

                        다릴 놓아 주었다는 전설이 있는 다리다. 보안의 불심에 부처님이 감동하여 만들어 준 다리라 한다.

 

 

                                 左 유마동천보여교(維摩洞天普女橋), 右 관세음보살 양연호(觀世音菩薩 梁蓮浩)

                                 백운거사서(白雲居士書)

                                 전설에는 유마사 창건주 유마운의 딸인 보안이 놓았다고 하나 보안교의 기록이

                                 1919년에 쓴 [동복군 유마사 봉향각 창건 상량문]에 쓰인 것으로 보아 1919년 이전에

                                 만들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계곡에 가로놓인 보안교를 지나면 옛 유마사터가 나온다고 한다.

                

 

절입구에 있는 유마사 표지석.

유마사의 창건전설을 믿는다면 지금으로 부터 무려 1400여년전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천년하고도 반세기가 넘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유마사가 한국전쟁의 피해를 고스란히 안고 모두 소실되어

옛 유마사부지근처에 새로운 터를 잡고 대대적인 불사를 일으켜 옛영화를 되찾고자 한다.

우리 문화를 지키면서 바른 삶을 지향하는 참신한 수행자를 길러냄으로써, 삶을 정화하고 고통에 처해있는 많은 사람들을

올바른 삶으로 이끌 수 있는 승려를 배출하는 것을 설립취지로 삼은 승가대학과 승가대학원이 있음으로 화순 모후산 유마사의

중창대작불사는 뜻대로 크게 이루어 질 것이다. 

 

 

                               유마사 찾아가는 길.. 

 

            (글 : 포토뉴스코리아, 굿뉴스피플 simp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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