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청자 도공의 애환이 서린 강진천태산 정수사

2012. 8. 24. 22:00전라남도 견문록/강진 견문록

 

천태산 산행에서 만난 뜻밖의 사찰 천태산 정수사.

사찰로의 여행은 항상 흥미롭다. 산과 사찰의 연관성 및 그 사찰이 가지고 있는 역사의 유구성과 건물의 아름다운 미학.

그렇기 때문에 산행이 있는 날은 꼭 주변의 사찰을 둘러보게 되었고, 열심히 카메라에 담고 취재를 해서 또 다른 사찰을 공부한다.

 

천태산 정수사는 과거엔 상당한 규모의 절이었다고 한다.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강진땅에서는 청자를 굽는 도공들과 많은 관련이 있으며, 최근 대대적인 불사를 일으키고 있어

머지않아 오랜역사에 걸 맞는 도량으로 거듭 날 것으로 보인다.

 

 

                                                                            추천에 감사드립니다.

 

 

정수사 입구엔 커다란 전적비 2개와 현감 이면휘의 비가  서 있다.

 

왼쪽은 염걸장군 전적비, 중앙은  운계천기대사 의적비,

우측이 이면휘의 비다.

 

염걸 장군은 1545년(인종1년) 강진군 칠량면 율번(栗邊)에서 출생했다.

자는 국충(國忠), 호는 퇴은당(退隱當)으로 기마와 궁술에 출중하여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구강포(九江浦, 현구십포)와 정수사 사이에 쳐들어오는 적을 두 아우 서(瑞)와 경(慶), 외아들 홍립(弘立)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섬멸했다고 한다.


왜군이 강진만을 거쳐 구강포로 들어왔던 것은 고려청자 때문이었다고 한다.

염걸장군은 적선 수백 척이 구강포에 들어오자 수백 개의 허수아비를 바닷가에 세우고 의병들이 후퇴하는 척 위장 전술을 펼쳐 정수사 골짜기에 매복해 유인된 적 수천 명을 소탕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염걸 장군은 의병장의 명을 받아 장흥 회령진과 몰운대(沒雲臺), 광양의 왜교성(倭橋成) 싸움에서 왜선 수백 척을 격파하는 등 연이은 큰 전공을 세우기도 했으며 특히 몰운대에서는 이순신의 셋째 아들 면을 살해한 적장 '馬希雍馬多齒'를 체포하기도 했다.


가을 강진청자축제때 구강포 해변에 등장하는 수군 허수아비는 왜군이 정자도료를 차지하려 강진만으로 처들어 왔을 때 위장전술로 염걸장군이 허수아비를 수백개 만들어 해안가에 세워놓아 초병과 의병들이 많음을 왜적에게오인하게 해 아군의 사기를 올려 적들을 물리친것을 재현한 것이다.

 

임진왜란의 영웅 염결장군의 사충신묘는 지방문화재 36호로 지정되 칠량면 단월리에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선교도총 부종수교 운계천기대사 의적비(8도 도총섭겸 승병대장)로 보면 정수사의 천기대사란 스님이 임진왜란 당시 승병장으로 공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현감 이면휘의 비는

정수사가 한 때 세금을 내지 못하여 정조 17년 의준 스님이 정수사에서 내는 각종 세금을 줄여 달라고 강진현감 이면휘에게 요청하였는데, 현감은 현재 고금도에 위치하는 관왕묘(關王廟)를 스님 20명이 지킨다는 조건으로 허락을 하여 정수사에서 바치는 모든 세금을 면제키로 하고 문서로 만들어 오래도록 전하게 한 것에 대한 공적비라 하겠다.

 

 

 

 

 

 

정수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으로 다산 정약용의 시귀에도 나온다고 한다.

다산이 1805년에 애제자 황상 등과 함께 정수사를 찾아 시를 남겼고, 1808년에도 정수사에 관한 시를 지을 만큼

정수사를 자주 찾은 것으로 알려졌으며, 강진의 유명한 사찰인 백련사보다 창건연대가 앞선다고 한다.

정수사지에 의하면 <천태산 정수사를 선종대가람으로 삼는다>하고, <천태산 운기사를 16종선교대가람으로 삼는다>는 기록과

<천개산의 천태봉에 정수사가 있다>는 내용으로 봐서 창건 당시 정수사는 천태종의 도량이었을 것이다고 전문가들은 추측한다.

 

 

정수사 사적기에 따르면 옛날에는 큰 규모의 사찰이었지만 현재는 대웅전과 요사채, 응진당, 천불전, 나한전, 산신각 만이 남아 있고

다른 건물은 없어졌다고 한다.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용운리 천개산(天蓋山)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大興寺)의 말사이다.

구군지(舊郡誌)에 의하면, 805년(애장왕 6)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하였다고 하지만, 도선은 827년(흥덕왕 2) 영암(靈巖)에서

출생하였고, 842년 승려가 되었으므로 그 연대에는 다소의 착오가 있는 듯하다.


 

창건 당시에는 계곡을 중심으로 양쪽 언덕에 묘적사(妙寂寺)와 쌍계사(雙溪寺)의 두 사찰을 건립하여 묘적사에는 천불상(千佛像)을

봉안하였으나 임진왜란때 화재로 소실되고 없어지고, 쌍계사는 그 후 수정사(水淨寺)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강희년간(康熙年間 )

(1622-1722)에 이르러 명칭을 정수사로 고치고 절에서 쓰는 직인도 바꾸었다고 한다.

 

 

 

      사찰이 건립된 후 한동안 폐허가 되었던 것을 1529년(중종 24) 중창하면서 정수사라 하였고, 1574년(선조 7) 성운(性雲)이

      중건하였으며, 정유재란으로 대파된 것을 1644년(인조 22)에 종인(宗印)이 현감 강유(姜諭)의 시주로 중건하였고, 1664년

      (현종 5)에는 능우(能佑)가 중수하였다.

 

 

      1706년(숙종 32) 처사(處士) 이득종(李得宗)이 당시의 현감이었던 김중려(金重呂)의 협력을 얻어 중수하였고, 1794년(정조 18)

      왕명으로 고금도(古今島)에 있는 관왕묘(關王廟)를 이 절에서 관리하게 되었으며, 조선 말까지만 하여도 강진 부도의 사암(寺庵)

      들을 관장하는 수찰(首刹)이었으나 차츰 퇴락하다가 6·25 이후 공비들에 의하여 소실되었다가 뒤에 사찰 승려들이 지방민의

      협조를 얻어 중건하였다.

 

 

      1991년에는 요사를 지었고, 1995년에는 사사자석탑(四獅子石塔)을 조성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01호로 지정된 대웅전과 나한전·산신각·종각·산문(山門), 요사채 등이 있다.

 

 

삼청루. 

정수사지(淨水寺志)는 1983년 강진문헌연구회장이었던 양광식 씨가 해남에서 찾아 번역한 것으로 오래전 잊혀진 정수사와 도공들,

임진란의 비사를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책머리에 실린 정수사 주지 석수현 스님은 발문을 통해 “정수사는 고려시대

청자문화의 전성기에 도공들의 정신적인 귀의처로 역할을 했다”며 정수사가 우리 민족 도자예술의 발전에 끼친 영향을 중시했다.

 


 

또 “정수사는 조선 선조시대 임진왜란을 당하여 서산 사명이 이끌었던 승의병의 수용사찰로서 유일한 호국도량이었다.

당시 승군이 군호로써 사용했던 산고동(法螺, 소라) 1개와 조정에서 내린 사령장 하나는 보관상 이유로 정수사의 본사인

해남 대흥사로 옮겨갔으며, 침계루에 있는 법고(法鼓) 또한 이관된 것이 확실하다.”고 한다.
이 사찰 최고 오래된 건물인 대웅전은 절의 중심에 있는 법당으로 석가모니를 모시고 있으며 4번에 걸쳐 수리한 기록이 있다.

구조는 앞면 3칸·옆면 2칸의 맞배집이며 다포계 양식이다. 공포의 조각수법이나 단청 등에서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을 볼 수 있어,

지난 1985년에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01호로 지정됐다.

 

 

천불전.

정수사는 고려시대 청자문화의 전성기에 청자를 만들던 도공들에게 선지식(禪知識)을 500년간이나 전하던 도량으로,

청자가 무사히 만들어지기를 정수사에서 기원하고, 뱃길 따라 운송할 때도 도공들이 정수사를 찾아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강진의 무위사와 정수사에는 도자기 운송선의 안전한 항해을 위해 별자리를 관측하던 천문대인 첨성각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 자취를 찾을 길이 없다고 한다.

 

 

 

 

도조사(陶祖祠)에서는 매년 청자축제가 다가오면 무명도공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데, 이는 성공적인 청자축제를 기원하고

수많은 도공들의 넋을 기리기 위함이라고 한다.

 

 

새로이 불사중인 나한전

 

 

 

사사자석탑(四獅子石塔)

 

 

당초에 묘적사에는 천불을 모시고 있었으며, 쌍계사에는 북과 종을 소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북과 천불이 해남 대흥사로 옮겨 갈 때에, 달구지에 싣고 가던 천불과 큰 북이 목이 메어서인지

당전 앞을 지날 때에 큰 북이 한없이 울었다 한다.

그 때 북을 나르던 스님들과 동네 아낙네들도 따라 울던 것은 마찬가지였다고 전한다.


 

그 큰북은 대웅전 부처님 앞에 있었는데 낫으로 떼꾸리(찌검줄)를 돌려서 북의 온 몸에 칭칭 감아서

항구이던 대구면 미산까지 굴러서 갔다고 한다. 그 곳에서 배를 이용하여 현재의 해남 대흥사로 옮겨 갔으며,

북 앞에 서면 사람보다 키가 더 컸다고 한다.

 

 

산신각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좌우 협시불은 아미타불과 약사불이라고 한다.

 

 

 

스님들 선방으로 쓰이는 듯.

 

 

천태산과 정수사 당우들..

 

 

               관음보살입상

 

 

 

 

감로수.

 

 

삼청루에서 바라본 대웅전.

 

 

요사채앞의 배롱나무꽃이 너무 멋있어 한참을 바라보았다.

 

 

종각.

 

 

올해 2월 화순 모후산 산행후 유마사에서 봤던 모후사에서 봤던 보안교와 비슷하게 생긴 돌다리가 정수사에도 있다.

이 다리를 놓기 위하여 사람들을 동편과 서편으로 나누어서 어느 쪽이 빨리 하는가 내기를 하였다 한다.

그 때에 한편은 현 위치에 까지 돌을 옮겨왔고 다른 한편은 용문에 사는 김 모 씨의 집 앞에까지 밖에 옮기지 못하여 경기에서 졌으며,

다리는 힘이 센 스님 세 명이 들어다가 놓았다고 전해온다.

 

청목수 전설이란 기념비가 절 입구에 있다.
대구면 천태산 아래 고즈넉이 자리한 정수사 입구에 있었을 거라 여겨지는 ‘청목수’의 전설에 의하면,

절(정수사)의 청목수(일명 통샘)는 매년 한번씩 솟구쳐 넘친다고 한다.
“어느 해 달밤에 노스님이 지나다 이 광경을 보고 물을 떠먹으려고 하는데,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 마시지 못하였다”고 전해진

청목수는 ‘‘이 넘치는 청목수 물을 마시게 되면 기운이 넘치고, 무병하고 장수한다”는 설이 있다.


이러한 전설의 의미를 살려 이 고장 청년 불자들인 청목회원들이 성금을 모아 통샘을 복원하였다는 기념비가 있지만,

지금은 각종 배수로 공사와 사방댐 공사로 인해 통샘의 위치를 확인할 수 없다고 한다.

 

친구들과 같이 떠난 산행 중에 마주친 정수사. 비록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천태산에 들르면 꼭 정수사에 들어 옛도공들의 넑을

위로하고 오면 어떨까.

 

(글 : 포토뉴스 코리아 simpro) 트위터 ☞ http://twitter.com/huhas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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