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천년미소를 찾아 떠난 여행(무위사편)

2012. 12. 3. 07:35전라남도 견문록/강진 견문록

 

도갑사를 나와 금릉경포대에 있는 차량을 회수하러 택시로 이동했다.

도갑사에서 금릉경포대까지는 월출산을 거의 한 바퀴 돌아야 한다. 물론 택시비도 꽤 나온다. 25,000원

다음 행선지는 무위사이다.

경포대에서 무위사까지 가는 2.5km 길은 좌우로 설록차밭이 환상적으로 펼쳐진 또 다른 드라이브 길이다.

몇 번을 설록차밭을 먼저 볼까 하다가 택시기사가 들려준 무위사 벽화이야기에 꽂혀 그대로 무위사로 내 달렸다.

 

 

무위사는 도갑사에 비해 규모가 그리 크지 않지만 일단은 문화재관람료가 없어 좋다.

그리고 주차장도 넓게 마련되어 조금만 올라가면 대웅전에 도달할 수 있다.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일주문을 보니 대대적인 불사의 영향은 도갑사에서 부터 받은 듯 하다.

과거의 무위사 사진을 보면 참으로 아담하고 예뻤던 것 같은데...

 

무위사의 창건은 617년(신라 진평왕 39) 원효(元曉)가 창건하여 관음사(觀音寺)라 하였다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인

875년(헌강왕1)에 도선국사가 중창하여 갈옥사(葛屋寺)로 개칭했다고 사적지에 나온다.

그 후 905년(효공왕 9) 에 선종인 가지산문(迦智山門)계통의 선각국사(先覺國師) 형미(逈微, 864∼917)가 고려 태조 왕건의

요청으로 무위갑사(無爲岬寺)에 머무르면서 절을 중수하고 널리 교화를 펴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고 한 기록과 경내에 있는

보물 507호인 선각대사편광탑비(先覺大師遍光塔碑)의 비명(碑銘)에 신라시대에도 이미 무위갑사(無爲岬寺)로 불렀으므로

형미 스님이 주석했던 10세기 초 이전에 무위갑사라는 절로 이미 불리워졌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신라 헌강왕6년(880년) 당시 54세였던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하는 도갑사에 비해 무위사의 창건연대는 617년

(신라 진평왕 39)으로 도갑사보다 약263년이나 앞선 사찰이었던 것이다.

선종사찰이었던 무위사는 1407년(태종 7) 12월에 천태종 17사 중의 하나로 소속되면서 

선종에서 천태종으로 사찰의 성격이 변동되었고,1430년(세종 12)에 극락보전을 건립하여 목조 아미타삼존불을

조성했으며, 1476년(성종 7)에는 극락보전 후불벽을 만들었고, 수륙재(水陸齎)를 빈번하게 행하였다..



 

앞서 본 도갑사가 정유재란의 화마를 피하지 못한 것에 비해 무위사는

임잰왜란 · 병자호란 두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절은 그다지 피해를 입지 않아 

본절에 당우(堂宇)가 23동, 암자가 35개로서 모두 58동에 이르는 대사찰을 유지하여

절의 웅장하고 화려함이 일도(一道)에 으뜸 이었다고 하지만 그 이후 점차 법당과 요사가 훼손되어져

몇 개의 전각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1678년(숙종 4)에는 극락보전 앞마당에 있는 괘불석주가 제작되었으며,

1739년 (영조 15)에 해초(海超) 스님의 공덕으로 전각이 보수되었는데 당시 미타전, 천불전, 시왕전 등이 있었다고...

극락보전이 국보로 지정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34년으로 조선총독부에 의해 국보 제13호로 지정되었다.



 

사천왕문은 도갑사 해탈문의 금강역사와 달리 보통사찰에서 보는 것과 똑 같고...

최근까지만 해도 남아 있는 당우는 극락전과 명부전 및 요사(寮舍)뿐이었는데, 1974년 벽화보존각(壁畵保存閣) ·해탈문(解脫門) ·

분향각(焚香閣) ·천불전(千佛殿) ·미륵전(彌勒殿) 등을 중건하면서 옛날의 모습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국보 제13호인 극락전에는 벽에 29점의 벽화가 있었으나, 지금은 본존불(本尊佛) 뒤의 탱화(幀畵)와 수월관음도만 남겨놓고,

27점은 보존각에 소장되어 있다고...

 

밖에서 본 사찰의 모습은 천년고찰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깨끗하다.

천왕문을 중심으로 좌우 건물들은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듯...

 

 

보제루를 보면 말에서 내려 걸어야 하는 옛 관료들의 모습이 떠 오르고...

천불전 부처님 옷을 새로이 입히고 모신 법당을 새로 짓는다는 불사가 진행중이다.

 

 

사천왕문에서 바라본 일주문과 바로 옆의 주차장까지 여기서 부터 아주 시원하게 보인다.

 

 

종무소로 쓰이는 건물

 

 

 

관음보살상 옆으로 보이는 건물은 아마도 공양간인듯

 

 

출입을 금하는 곳은 요사채로 보이고.

 

 

요사채.

 

 

명부전.

 

 

천불전 기와불사 발원 모연문이 걸려 사찰 탐방객의 발길을 모으고...

 

 

세 쌍둥이 느티나무까지 무위사도 평범한 절집이란 것을 알려주지만...

 

 

대웅보전 정 중앙 뜨락에 있는 이 것은 무엇인고?

배례석으로 부처님께 예는 올려야 하는데 여러가지 이유로 법당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이곳에서 부처님께 예를 올린다고 한다.

 

 

대웅전에 있는 부처께만 예를 올린 것이 아니라 이런 배례석은 석탑이나 석등앞에도 있다 하니

단지 법당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저 법당이 비좁아 예를 드리고 싶은데 그러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배려인 듯...

 

 

무위사 극락보전은 국보 제13호이다.

무위사 극락보전에는 2개의 국보(國寶)와 3개의 보물(寶物)이 있다.

국보 제 13호인 극락보전 건물과 국보 제313호인 아미타여래삼존불벽화이다.

3개의 보물은 제1312호인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과 제1314호인 백의관음도

그리고 극락보전 내벽의 제1315호인 사면벽화(四面壁畵)이다.

보물 제1313호였던 아미타여래삼존불벽화가 국보313호로 지정되면서 보물1313호는 빠졌다.

 

 

법당안에는 보물 제1312호로 지정된 아미타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3년전 아미타 삼존불의 정밀안전진단을

실시한 결과 어깨부분에 균열이 생겼고 목조가 아닌 흙으로 만든 소조(塑造)임도 밝혀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보물 제1312호인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은 소조아미타삼존불좌상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나?

그 아미타삼존불좌상은 최근 보수와 복원을 마치고 아미타삼존불 개금불사 회향 및 점안법회를 봉행했다고 한다.

 

  

극락보전은 세종 12년(1430)에 지어졌으며 조선초기의 대표적인 주심포 양식건물로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주심포란 지붕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양식이고, 맞배지붕이란 옆에서 봤을 때

이 건물처럼 사람인(人)자 모양이로 주심포와 더불어 간결하면서도 건축물의 안정감과 단순한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는 양식이다.

극락보전은 서방의 극락정토를 주재하는 아미타불을 모시는 곳이기에, 법당 안에는 아미타삼존도가 후불탱화로 그려져 있다고...


 

 

국보 제13호인 극락전에는 아미타삼존불과 벽에 29점의 벽화가 있었으나, 지금은 본존불(本尊佛) 뒤의 탱화(幀畵)와

수월관음도만 남겨놓고 27점은 보존각에 소장되어 있다고...

 

 

이 벽화들에는 전설이 있는데, 극락전이 완성되고 난 뒤 한 노인이 나타나서 '내가 이 법당의 벽화를 그릴 것이니,

그 대신 49일간 절대로 이 법당 안을 들여다 보는 이가 있어서는 안됩니다.'라고 49일 동안 법당 안을 들여보지 말라고

당부한 뒤에 법당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49일 동안  절의 주지스님이 도대체 저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매일 궁금했으나, 결국 궁금중을 참지 못하고

마지막 49일 째 되는 날, 주지(主知)스님은 설마 작은 구멍으로 살짝 보는 것은 괜찮겠지 .. 라고 생각하며 손가락으로

창호지에 작은 구멍을 뚫어 몰래 들여다 보고 말았다고...

 

그런데 법당 안에는 있어야 할 노인은 없고, 파랑새 한 마리가 붓을 입에 물고 날아다니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고...

이에 화들짝 놀란 주지스님이 법당(法堂) 문을 열고 들어서니, 마지막으로 관음보살(觀音菩薩)의 눈동자를 그리고 있던

파랑새는 입에 붓을 문 채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고...

그래서 지금도 극락보전의 벽화 속 관음보살에는 눈동자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전설은 무위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글쓴이가 그동안 다녀본 사찰에서도 몇군데 그런 전설이 있었다..)

 

 

극락보전의 지붕기와의 문양이 틀린것으로 보여 같은 문양의 기와를 구웠다면 어떠했을까.

 

 

           극락보전에 봉안된 보물 제1312호인 아미타삼존불과 국보제313호인 아미타여래삼존불벽화(자료출처 : 문화재청)

 

 

미륵전

 

 

산신각은 보통의 절과 달리 앞에 산 이름을 붙힌 것이 특이하다.

월출산 산신각이니 이곳에 모셔진 산신은 분명 월출산 산신이 분명하렷다.

 

 

나한전

 

 

 

선각대사 편광탑(先覺大師遍光塔)은 선각대사(先覺大師) 형미(逈微)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보물 제507호이다.

고려 정종 원년(946년)에 세웠으며, 선각대사는 신라 말의 명승으로,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지 14년만에 돌아와 무위사에서

8년간 머물렀다고 한다. 고려 태조 원년(918년)에 54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태조 왕건(王建)이 ' 선각(先覺) '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리고, 탑 이름을 ' 편광탑(遍光塔) '이라 하였다고...

 

천불전으로 가는 길

 

 

천불전은 경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산기슭에 홀로 서 있다.

천불전 개금불사와 중창불사 현수막이 걸린것으로 봐서 극락보전 뒤의 공간에 새로이 천불전을 지을 듯...

 

 

성보박물관에는 극락보전의 내벽사면벽화가 보관전시되어있다.

1974년 극락보전 해체수리시 내벽에 있던 벽화 가운데 아미타후불벽화와 백의관음벽화를 제외한

27점의 벽화를 떼어내어 보존각(保存閣)을 새로이 지어 보존 전시하고 있으며 이들 벽화는 일괄 보물 제1315호 지정되어 있다.

 

 

벽화들 감상모드...

 

 

 

 

 

 

 

보존각 내부

 

 

극락보전을 제외한 다른 건물들이 비교적 깨끗하여 최근에 지어졌다면,

범종각은 예전모습 그대로인듯...

 

 

무위사 삼층석탑은 전남문화재자료 76호로 지정되어있다.

 

 

청화당

 

 

 

                무위사를 나서며 새로이 불사가 일어나기 전의 모습을 인터넷에서 찾아 보았다.

                역시나 사천왕문을 통과하면 바로 극락보전이 나와 아주 심플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지만

                도갑사와 마찬가지로 무위사도 대대적인 불사로 절의 규모가 상당히 커졌다.

                월출산에서 무위사로 내려오는 등산로는 지금 훼손탐방로 복원공사로 2016년 12월 31일까지

                입산이 통제되고 있다. 그곳이 풀리는 2017년 부터는 아마도 무위사에서 문화재 관람료를 받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문화재 관람료를 지불하고도 볼만한 국보와 보물이 많기에 이 호젓한 사찰에는 탐방객들이 끊이지 않을 것으로

                보이지만 자꾸만 옛날의 모습이 더 정겨워 보이는 것은 왜 일까?

 

                (5편 월출산 강진다원 편에서 계속)

 

 1편 월출산 천년미소를 찾아 떠난 여행(구정봉 편),

 2편 월출산 천년미소를 찾아 떠난 여행(마애불 편)

 3편 월출산 천년미소를 찾아 떠난 여행(도갑사 편)

 4편 월출산 천년미소를 찾아 떠난 여행(무위사 편)

 5편 월출산 천년미소를 찾아 떠난 여행(강진다원 편)

 

     (글 : 포토뉴스 코리아 simpro) 트위터 ☞ http://twitter.com/huhas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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