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여행)다산초당이 남도답사 1번지인 이유.

2012. 12. 25. 08:05전라남도 견문록/강진 견문록

 

정약용이 황사영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에 연루되어 문초를 받고 강진에 유배되어 왔을 때 천주교도라고 모두들 멀리할 때

그를 불쌍히 여겨 거두어 들인 사람은 다름아닌 동문밖 주막의 노파였다.

다산은 그곳에서 4년을 보내고 자신이 거처하던 방을 사의재라 불렀으며 그 후 혜장스님의 도움으로 강진에서 멀지 않은 우이산

우두봉에 위치한 고성사에서 1년을 보내게 되고 자신이 거처하던 방을 보은산방(寶恩山房)이라고 불렀다.

 

혜장은 보은산방으로 자기의 제자가운데 가장 학문이 뛰어난 수제자 수룡색성(袖龍賾性)을 보내 다산의 시중을 들게 하였으며,

차를 아주 잘 볶고 화엄경에 통달하였으며, 두보의 시에도 능한 색성에게서 다산이 흡족할 무렵, 혜장은 또 한사람의 학승인

철경응언(철鯨應彦)을  다산에게 배치할 정도로 다산을 흠모했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색성과 응언 두 젊은 학승이 마음에 들었으면 다산은 자기의 제자처럼 생각, <다신계절목(茶信契節目)>에 따로 인연이

있는 사람들 이라는 글을 남겼을까.

 

그러나 1년도 못되어 보은산방에서 내려온 정약용은 이청의 집에서 또 2년을 머무는 등 총 18년간의 유배생활 중 7년을 이렇게

집도 없이 떠도는 불쌍한 유배자로 감시받고 사는 신세가 되었으며 그때마다 혜장스님은 다산돕기를 자기일처럼 하였다고 한다.

 

 

그런 다산에게 다산초당은 삶의 에너지였고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채 변화시킨 계기가 되었으니...

그런 다산초당을 이야기 하면서 백련사 혜장스님간의 우정을 또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정약용은 혜장에게 아암(兒庵)이라는 호를, 혜장은 정약용에게 다산(茶山)이란 호를 지어주었고, 혜장이 40세라는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불자로서 도에 이르지 못함을 한탄하다 과음으로 요절했을 때 그 비문도 다산이 직접 썼다고 하니 둘의 우정은 비록 6년에

머물고 말았지만 6년을 넘어 평생을 같이할 정도로 빛났던 것이며, 다산이 적은 아암의 탑비명에는  “나이 서른 다섯에 이르자 시를

탐하고 술을 함부로 마셔 엎어지고 자빠진지 4-5년, 구가(九家)의 학을 깊이 연구하고 불법도 깊이 연구했는데 그만 역리(易理)를

듣고 나서 스스로 후회하며 몸을 그르쳐 고민한지 6-7년 술병을 얻어 배가 부어 죽었다”고 적었다고 한다.

 

 

황사영 백서사건[ 黃嗣永帛書事件)은 1801년(순조 1) 천주교도 황사영이 북경에 있던 프랑스 선교사에게 보낸 편지로 인해 발생한

사건으로 신유박해로 청나라 신부 주문모 등 많은 천주교도가 처형되거나 귀양을 가자 주문모에게 세례를 받은 황사영은 탄압의 실태

와 그 대책을 적은 편지를 북경에 있던 프랑스 주교에게 보냈다. 이 편지에서 황사영은 교회를 재건하고 포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프랑스 함대를 파견해 조선정부에게 압력을 가하는 것이 좋겠다는 내용을 적었다.

그러나 이 사실이 탄로되어 일당은 모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조선정부는 천주교가 단순히 미풍양속과 인륜을 어기는 데 그치는 것

이 아니라 나라까지 팔아먹는다고 생각해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강화했다. 이 백서는 현재 로마 교황청에 보관되어 있다.

(자료출처 : 네이버지식백과)

 

 

백련사에서 다산초당까지는 800m에 달하는 오솔길로 봄엔 붉디 붉은 동백꽃 향이 풍기고, 여름엔 대숲 맑은 바람이 불어오며,

가을엔 낙엽진 오솔길에서 사색을 만날 수 있으며, 겨울엔 새하얀 눈 길속에서 다산과 아암 혜장스님의 발자국을 만날 수 있다.

 

 

백련사의 차밭은 아암 혜장스님과 다산의 손때가 닿은 차밭으로 여느 사찰의 차밭에 비해 상당히 관리가 잘 되어있다.

월출산 자락의 강진다원에서 보았던 잘 단장된 모습은 아니기에 한국 전통 야생차의 낭만이 보이는 것 같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보면 강진과 해남땅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1장 제1절로 삼고 있다.

그는 이 땅으로 무려 여덟번에 걸쳐 답사길에 나섰다고 한다.

그 첫 기착지는 항상 월출산 자락에 깊이 숨어있는 강진 무위사였으며 그 이유는 바로 무위사 극락보전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유홍준이 무위사 극락보전에 버금갈 정도로 필이 꽂힌 것은 다름아닌 정약용의 18년 유배지인 강진땅 이었으며

그의 학문적 결실이 완성된 목민심서가 쓰여진  다산초당을 항상 그리워했음은 분명하다고 고백하고 있다.

 

 

 

 

사실 정약용의 다산초당을 가기전에는 들러야할 곳 세 군데가 있다.

그 첫 번째가 강진땅에 유배와서 4년을 묶은 주막집인 사의재이며, 두 번째가 1년을 지낸 고성사 보은산방이다.

그리고 세 번째가 3년을 지낸 이청의 집이다. 이 모든 곳을 둘러보고 다산초당을 가는것이 맞을 것이나, 우리도 보통의 사람처럼

세 군데는 생략하고 다산초당부터 들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다음에 강진을 들러 다산초당에 오게될 때는 이러한 다산의 발자취를 따라 갈 것을 스스로에게 약속해 본다.

 

 

 

 

澹靄殘陽照上方(담애잔양조상방) 엷은 노을 남은별이 절집을 비추이니/

半含紅色半含黃(반함홍색반함황) 반쯤은 붉은 빛이 빈쯤은 누른빛이/

淸茶一椀唯吾分(청차일완유오분) 맑은 차 한 사발이 다만 내 분수거니/

羶臭人間盡日忙(전취인간진일망) 누린내 나는 세상 온종일 바쁘구나/

아암(兒菴) 혜장(惠藏) 「산거잡흥(山居雜興)」 20수 중 제 14수 淸茶一椀(청차일완)으로

차에 대한 올곧은 사랑을 느낄 수가 있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백련사와 동백숲.

백련사주변엔 소나무가 없다고 한다. 조선조때 국가에서 장려하는 소나무을 사찰에서 땔감으로 쓴다는

누명을 쓰고 스님들이 고초를 겪은 후 후에 모조리 베어버렸다는 전설이 있다고...

 

 

 해월루로 오르는 길...

 

 

해월루(海月樓)는 '바다에 위에 뜬 달'이란 뜻으로 2007년 5월 19일 제7회 다산제(茶山祭)개막에 맞추어

다산과 혜장스님의 우정의 길을 기념하기 위해 다산초당과 백련사간의 오솔길에서 구강포가 바라보이는 곳에 세워졌다

 

 

해월루에서 바라본 구강포

 

 

천관산

 

 

가우도 출렁다리

 

 

이제 해월루를 나와 백련사에서 다산초당까지 이어지는 오솔길을 거닐며 200여년 전 다산과 아암을 만나보기로 한다.

삼남길은 조선시대 10대 대로 중의 하나로 사람으로 치면 동맥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한다.

전라도 해남 땅끝에서 시작하여 충청도를 거쳐 경기도 평택 - 오산 - 수원을 지나 남태령을 넘어 한양 남대문까지 삼남지방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를 잇는 길이라 하여 삼남길이라 불렀고 전략적으로는 전라도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군사 이동 통로이자

관리들이 임지를 드나들던 길이었고, 경제적으로는 봇짐 맨 보부상들이 드나들며 서민경제의 한 축을 담당했고, 전라도 특산품을

임금님께 진상하던 이동로였다고 한다.

 

사회적으로는 전라도 선비들이 서울로 과거시험 보러 가던 길이며, 유배지로 오며 자꾸만 뒤 돌아보던 한 많은 길이였을 것이다.

나주로 유배온 정도전과 강진으로 유배온 정약용도 모두 이 삼남길을 걸어 왔다고 한다.

표지판의 화살표는 전국 공통으로 주황색은 땅끝 해남방향을, 녹색은 서울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 역할을 한다고 한다.

 

 

제주도 올레길이 이 길에 비할 손가, 지리산 둘레길이 이 길에 비할 손가.

걷기열풍이 불어닥친 웰빙시대 삼남길은 '정약용 남도유배길'과 겹치기에 역사를 제대로 인식하는

진정한 의미의 동맥길이 될 것이며, 다산초당이든 백련사든 탐방을 마쳤다면 만덕산 최고봉인 깃대봉까지는

900m밖에 안되기에 등산복에 등산화 차림이라면 한 번쯤 올라가 보길 권한다.

정약용이 월출산을 바라보며 그 너머 고향땅을 그리워했을 멋진 조망터가 나오기에..

 

 

'정약용 남도유배 길' 지난 2010년 11월에 행정안전부의“명품녹색길 우수 사례 33선”에 선정된 바 있으며

2011년 전라남도의‘걷고 싶은 남도길 10선’에도 선정됐다.

그중 백미가 바로 백련사와 다산초당을 잇는 오솔길인 것이다.

이 길에는 천연기념물 동백나무와 야생차밭이 있으며 바닥을 덮은 푹식한 낙엽이불을 사뿐히 즈려밟고 지나가며

다산과 아암의 채취를 느낄 수 있는 길이다.

 

 

백련사에서 다산초당까지는 약 800m로 긴 내리막이지만 이 길은 정약용이 1801년 강징으로 유배왔을 때 걸었던 길이다.

하여, 강진군에서 지난 2009년 문화체육관광부가 공모한 '스토리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사업에 '정약용 남도유배길"로

선정되어 최근 4개코스 61.5km의 유배길이 완성되었다.

문화생태탐방로는 모두 6군데로 강화도의 강화나들길, 여주와 원주를 잇는 여강길, 단양과 영주를 잇는 소백산 자락길,

영덕 삼천간 동해트레일, 고창 100리길, 하동 박경리토지길, 강진의 정약용 남도유배길이며, 참고 ; 정약용 남도 유배길

삼남길을 따라 가는 정약용 남도유배길은...

 

 

1코스 : 사색과 명상의 다산오솔길 [15km/ 5시간]

           다산수련원→다산초당→백련사→철새도래지→남포마을→목리마을(이학래의 집)→강진5일장→사의재→영랑생가


2코스 : 시인의 마을 길 [13.4km/ 4시간 30분]

           영랑생가→보은산방(고성사)→솔치→금당마을(백련지)→성전달마지마을


3코스 : 그리움 짙은 녹색향기 길 [16.6km/ 5시간 30분]

          성전달마지마을→무위사→안운마을(백운동)→강진다원(태평양녹차밭)→월남사지3층석탑→월남마을→누릿재→천황사

 

4코스 : 월출산 자락, 기 충전길 [16.5km/ 5시간]

          천황사→월출산 기찬묏길(영암)→월출산 기찬랜드→도선암자→도갑사→왕인박사유적지→구림마을(도기박물관)         

 

 

오솔길의 끝에는 다산초당이 자리하고 있다.

 

 

천일각이라 불리우는 정자는 다산유배시절에는 없었지만 정약용이 비교적 조망이 좋은 이곳 에서

정조대왕과 형인 정약전을 그리워했을 것으로 생각하고 구강포가 바라보이는 이곳에 1975년 강진군에서 세웠다고 한다.

 

 

천일각에서 바라본 구강포. 이곳에서 헝 정약전이 유배중이 흑산도가 보일리 만무하지만,

학문과 저술활동 중 잠시 이곳 너럭바위위에 걸터앉아 형을 그리워했을지도...

 

 

다산초당은 원래 산 아래 귤동마을에 살던 윤단과 그의 아들 윤규로, 윤규하, 윤규의 산장이었다고 한다.

정약용을 혜장스님으로부터 소개받은  귤동마을의 윤단이 그의 손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정약용을 초빙했고

윤종진이란 사람이 숙소로 초당을 알선했다고 하니 정약용의 외가인 해남윤씨 집안의 도움을 음으로 양으로

정약용을 있게 만든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이 사진은 초의선사가 그린 다산초당의 모습이다.

                  담장이 둘러쳐 있고 동암과 연지석가산옆의 초당이 있으며 서암은 보이지 않기에

                  서암은 천일각과 함께 최근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천일각에서 다산초당으로 내려가면 보이는 첫번째 건물이 동암이다.

다산이 초당에 머무는 동안 저술활동을 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장소로 목민심서가 여기서 쓰여졌으며,

1975년 강진군에서 천일각을 세울 때 함께 복원한 것이다.

 

 

                    동암에는 두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다산동암(茶山東庵)은 정약용의 글씨를 집자(集字)한 것이다.

 

 

                보정산방(寶丁山房)은 '정약용을 보배롭게 모시는 산방'이라는 뜻으로 추사 김정희가 직접 썼다고 한다.

               

 

 

다산초당이 초가였던 것을 기와로 바꾸고 동암과 서암이 새로인 복원되며 옛모습을 잃었지만

아마도 이 연못은 정약용이 초당에 있을 때의 모습 그대로 이지 않나 싶다.

직접 연못을 파고 축대를 쌓았으며 물을 끌어다가 폭포를 만들었다고 하니 한땀 한땀에서 그의 손길을느껴본다.

연못 가운데 섬처럼 생긴 돌무더기는 석가산(石假山)이라고 하며 다산이 쌓았다고 한다.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은 다산초당의 4경이다.

 

 

다산초당의 옆툇마루에서 연못을 바라보며 기르고 있는 잉어들과 수도 없이 대화를 나누었을 다산을 생각해 본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에도 초당의 제자들과 주고받은 편지에서 물고기들의 안부를 물었다고 할 정도이니...

 

 

다산초당의 현판도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모아 만든 집자(集字)라고 한다.

 

 

                    다산초당의 주인인 다산 정약용의 초상화가 다산초당안에 놓여있다. 

                200 여년 전 안경쓴 모습에서 실학의 대가다운 면모가 보인다.

 

다산초당 뒤로 돌아가면 다산초당 2경인 약천(藥泉)을 만날 수 있다.

물이 촉촉이 젖어있는 돌틈을 파보니 맑은 물이 솟아나왔다는 약천(藥泉)이다.

다산은 약천의 물을 마시면 '담을 삭이고 묵은 병을 낫게 한다'고 기록했으며,

이 물을 떠서 솔방울로 숯불을 피워 찻물을 만들었다고 하니... 폭포의 물은 어디다 쓰려고..

 

 

다산초당앞에는 다산초당 3경인 다조(茶竈)가 있다.

예나 지금이나 그자리에 있었을 것 같은 돌이지만 평범한 돌이 아니고 다산이 차를 끓이던 다조(茶竈)라는 부뚜막이다.

솔방울을 꺾어 숯불을 만들어 찻물을 끓인 다음 초당으로 가져가기 전까지 여기서 차와 대화를 나눈 곳.

 

 

다산초당과 서암 사이로 난 산길을 조금 오르면...

 

 

다산초당1경인 정석(丁石)이 나온다.

다산이 해배를 앞두고 초당위 암벽에 직접새겼다는 글씨로 조각솜씨도 조각가 못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다산초당은 팔작지붕으로 된 번듯한 기와집이다.

이 건물은 1958년 다산유적보전회가 다산초당이 무너져 폐가가 된 것을 기와지붕을 얹어

고쳐지은 것으로 초희선사가 그린 다산초당이 본래 모습이다.

그러니 혹여라도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다산초당에 들렀다가 번듯한 기와집을 보고 깜짝 놀랄일을 만들지 말았으면 한다.

다산은 초당에서 유배생활을 했지 이렇게 호화찬한한 당시 궁궐같은 집에서 유배생활을 한 것은 아니니까...

 

 

서암이라 불리우는 곳은 다산이 이곳에 있을 때는 없었다.

아마도 다산초당의 관리동으로 지어 놓은 듯...

 

 

아암 혜장스님을 만나 우정을 나누었던 그시설 다산은 차(茶) 와 선(禪)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그를 숭배했던 후학들은 당연히 이곳 다산초당을 성지로 여기게 되었고, 1818년 다산의 유배생활이 마무리되던 해에

그의 제자들이 다신계(茶信契)를 조직하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차모임이라고 한다.

 
다산과 혜장이 차 문화를 이끈 후에 차문화의 맥은 추사(秋史)김정희(金正喜)와 초의선사(草衣禪師)로 이어졌다고 한다.

1809년 동시사로 청나라에 가는 아버지를 따라 연경에 간 추사는 그곳에서 당대의 석학들과 교류하면서 경학(慶學),금석학(金石學),

서화(書畵) 등에서 많은 영향을 받는데 이 때에 차문화의 진수를 몸에 익히고 돌아왔다고 한다.

그후 고증학을 도입하면서 많은 친구들에게 차 마시기를 권하며 스스로 승설학인(勝雪學人)이라 칭하기도 했다고...

 
초의선사는 다산의 아들인 유산(酉山)의 소개로 추사를 만나게 되며, 한양에 초대받은 초의는 두 해 동안을 장안에 머물면서

유산과 추사를 중심으로 많은 선비들과 교분을 맺었다고 한다.

그 후 해남 대흥사로 돌아온 초의는 해마다 봄이면 정성들여 차를 만들어 추사에게 올려 보냈으며, 추사는 초의선사가 보낸 차를

한양의 고관대작이나 선비들에게 전파하였고, 그 들과 차를 마시는 자리마다 초의의 차사랑 이야기를 전해다고 한다.

초의선사는 이를 계기로 중국의 만보전서(萬寶全書)에서 차에 관한 기록을 뽑아 다신전(茶神傳)을 쓰게 되며, 그후 추사를 통해

알게 된 해거도인 홍현주의 부탁으로 ‘동차(東茶)’ 곧 ‘한국의 차’를 찬미하는 동다송(東茶頌)을 저술하여 다서의 불모지에 빛나는

업적을 남겨 다성(茶聖)으로 추앙받고 있다고 한다.

 

 

다산초당에서 귤동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참으로 다양하다.

절 정비된 돌계단이 있는가 하면,

 

 

자연석 그대로 세월에 깎여나간 울퉁불퉁한 돌길도 만나고,

 

 

돌 길과 뿌리의 길 사이로 산 기슭으로 난 오솔길도 있고,

 

 

 

뿌리의 길도 있다.

 

 

정호승 시인의 뿌리의 길이란 시비도 있고.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한답사기의 다산초당편에서 다산을 축약해서 정의하기를...

다산을 알기위한 몇권의 필독서와 논문이 있다고 하며 송재소 번역의 <다산시선>, 박석무 번역의 <다산산문선>,

윤사순 편의<정약용>, 박석무 저<다산기행>, 최익환 저<실학파와 정다산>, 이이하 저<목민철학의 이론가>등이 있으며,

세상에는 '다산을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다산을 아는 사람도 없다'라며 다산이 지닌 총체성을 자기주장을 쫓아 실학자로,

경륜가로, 경학자로, 의학자로, 약학자로, 음악가로 해석한다고 한다.

 

그리고 위당 정인보는 '다산선생 한 사람에 대한 연구는 곧 조선사의 연구요, 조선근세사상의 연구요, 조선혼의 밝음과 가리움 내지

조선성쇠존망에 대한 연구이다.'라고 설파하였으며, 갑오농민전쟁 때 동학군이 선운사 마애불 배꼽에서 꺼냈던 비기는 곧 <목민심서>

였다는 전설과 월맹의 호지명이 부정과 비리의 척결을 위해서는 조선 정약용의 <목민심서>가 필독의 서라고 꼽았다고 한다.

 

전두환이 유홍준이 어려워서 몇 장 넘겨보지도 못한 책을 해외출장 때에는 비행기안에서 기자들이 지켜보는 데서 열심히 읽었다고 하니

자고로 이 나라의 위정자라고 한다면 정약용의 목민심서는 당연히 읽어야 하는 필독서가 된 셈이며, 다산초당을 나와 다산기념관을

가 봐야 하나 시간이 지체되어 기념관문은 닫히고 말았다.

하여, 차후에 강진땅을 다시 밟을 때 앞서 이야기한 다산의 유배지 세곳과 다산기념관까지 몽땅 들러보는 기회를 가져야 겠다.     

 

(강진여행) : 작다고 얕보면 큰일날 강진만덕산(1편)

(강진여행) : 정약용의 발길이 머문 진달래 핀 강진만덕산(2편)

(강진여행) : 다산과 혜장스님의 우정이 어린 만덕산 백련사(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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